신현수의 걷기여행 19 - 굴업도(상)

▲ 연평산에서 내려다본 굴업도.
9월 24일, 굴업도를 사랑하는 문화예술인모임과 인천작가회의가 함께 진행한 굴업도 답사를 다녀왔다. 연안여객터미널에는 생각보다 사람들이 많았다. 예전에는 사람 북적거리는 것이 싫었는데, ‘인천사람 과문화’라는 사단법인을 만들고 나서 인천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된 지금, 사람 많은 게 오히려 반갑다.

그러나 나의 인천사랑은 아직 멀었다. 터미널에 앉아 연안여객터미널에서 갈 수 있는 섬들을 살피는데 낯선 이름이 아직도 많다. 문갑도ㆍ백아도 등은 들어 봤지만 지도ㆍ풍도ㆍ육도ㆍ울도 등은 섬 이름조차 생소하다.

오전 9시 30분께 떠난 고속페리가 1시간 약간 넘어서 덕적도 진리항에 도착했다. 멀미를 안해서 다행이 다. 지난겨울 울릉도 가던 때의 뱃멀미가 떠오른다. 굴업도 가는 배편까지 시간이 약간 남아 부두에서 가자 미회를 떴다.

가자미와 가오리의 차이는 설명을 들어 알겠는데 가자미와 간자미는 약간 헷갈린다. 간자미는 사전에 ‘가오리의 새끼’라고 나와 있는데 약간 이해가 안 간다. 내 생각에는 간자미는 가자미의 방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굴업도 가는 나래호가 11시 20분께 출발했다. 문갑도를 들러 울도ㆍ지도 등을 거쳐 굴업도로 가는 배인데 문갑도에서 고장을 일으켰다. 부두에 접안하는 문이 안내려갔다. 결국 문갑도에 내릴 사람들은 작은 배가 와서 태우고 갔다.

함께 간 이세기 시인의 고향이 바로 이 덕적군도의 문갑도다. 이 시인의 첫 시집 제목도 ‘먹염바다’다.

바다에 오면 처음과 만난다
그 길은 춥다
바닷물에 씻긴 따개비와 같이 춥다
패이고 일렁이는 것들
숨죽인 것들
사라지는 것들
우주의 먼 곳에서는 지금 눈이 내리고
내 얼굴은 파리하다
손등에 내리는 눈과 같이
뜨겁게 타다
사라지는 것들을 본다
밀려왔다 밀려가는 것 사이
여기까지 온 길이
생간처럼 뜨겁다
햇살이 머문 자리
괭이 갈매기 한 마리
뜨겁게 눈을 쪼아 먹는다 (이세기 ‘먹염바다’ 전문)

먹염이 무슨 뜻이지? 사전을 찾아보면 ‘염’은 섬보다 작은, 바윗돌로 된 섬이라고 나와 있다. 그러니까 먹염은 먹섬과 비슷한 말이고 한자로 하면 ‘묵도’다.

배 위에서 가자미회와 먹는 소주 한잔은 각별하다. 인천 연안의 배들을 타고 다니는 여객들을 대상으로 서비스 설문조사를 한다. 설문지를 작성했더니 양말을 한 켤레 준다. 세상에는 별별 직업이 다 있다.

굴업도는 덕적도에서 남서쪽으로 13㎞쯤 떨어져 있다. 면적은 50여만 평, 해안선의 길이는 13.9㎞, 리아 스식이다. 굴업도는 원래 굴압도였다. ‘굽을 굴(屈)자’ 와 ‘오리압(鴨)자’를 써서, 물 위에 구부리고 떠있는 오 리의 모양과 비슷하다 하여 붙여졌다. 1910년께부터 는 굴압도가 굴업도(屈業島)로 바뀌었고, 1914년에 팔 굴(掘)자와 일 업(業)자를 써서 덕적면 굴업리(掘業里)가 되었다.

굴업(掘業)은 땅을 파는 일이 주업이라 는 뜻으로 굴업도는 쟁기를 대고 갈만한 농지는 거의 없고 모두 괭이나 삽 등으로 파서 일구어야하기 때문 에 굴업(掘業)이란 지명이 되었다고 하는데, 좀 억지 스러운 데다가 뜻도 별로 좋지 않다. 옛 이름 굴압도 로 바꾸는 것도 검토해볼 만하다.

참으로 기구한 굴업도의 운명

▲ 굴업도 지도.
굴업도의 운명이 참으로 기구하다. 다 아는 것처럼 1994년 정부는 굴업도를 방사성폐기물 관리시설터 로 선정했다. 이 발표가 있기 전 정부는 이미 경북 울진ㆍ영덕ㆍ영일, 충남의 안면도 등에 핵폐기물 처분장을 설치하려다 주민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힌 바 있었다.

이 발표를 들은 덕적도의 주민들은 ‘굴업도 핵폐기물 처리장 건설 결사반대 덕적면 투쟁위원회’를 결성했으며, 이후 1995년 11월 30일 정부가 지정 고시를 해제하겠다고 공식 발표할 때까지 1년여에 걸쳐 목숨을 건 피나는 싸움을 전개했다.

사실 굴업도는 이미 1991년 한국원자력연구소에서 진행한 지질조사 결과 단층이 여러 개 발달돼있다는 점, 절리가 많이 발달해 균열이 보인다는 점, 선박 접안시설이 극히 좋지 않다는 점 등으로 부적합 판정을 받은 바 있으나, 갑자기 1994년에 적합 판정으로 바뀌어버린 것이다.

이 판정 과정에서 정부는 지극히 정치적인 고려를 한 것으로 보이는데, 지정 당시 굴업도의 행정구역은 경기도였지만 1995년 3월 1일에 인천시로 편입될 예정이어서 경기도민과 인천시민 모두 별관심을 갖지 않을 것이라는 점과 이주해야할 가구가 6 가구밖에 안 돼 보상이 용이하다는 점을 주로 고려했던 것이다.

우리나라의 핵폐기물은 주로 동해안과 남해안의 고리ㆍ영광ㆍ월성 등에 건설된 핵발전소에서 나오는 데, 굴업도에 핵 폐기장을 건설하기로 결정했다는 것 은 핵폐기물을 배로 나르겠다는 것이고, 그렇다면 배 가 하늘로 날아갈 수는 없는 바에야 남해를 거쳐서 서해안으로 빙 돌아가야 할 텐데 만일 운반 중에 폭 풍우라도 만나 배가 뒤집히기라도 하면 핵폐기물은 모두 어찌 되는 것인지, 생각만 해도 아찔한 발상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런 위험천만한 일을, 행정구역이 개편되는 과도기이고, 반대할 주민이 많지 않다는 아주 단순하고 정치 적인 이유로 결정했다니, 과거 정부의 무식함이 참으 로 놀랍다. 굴업도를 핵 폐기장으로 건설하겠다는 발 표 후 정부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병력 14개 중대 1200 명으로 ‘인천경비단’을 창설해 덕적도에 주둔시킨 일 이었다.

▲ 씨앤아이레저산업(주)가 설치해 놓은 알림판.
또한 덕적면 주민에게 ‘지역발전기금 500억원’ 을 지급하고 덕적면을 서해안 중심 관광단지로 집중 육성할 것이라는 정책도 아울러 발표했다. 덕적도 주 민들은 인천시민들과 힘을 합쳐 ‘채찍’과 ‘당근’을 모 두 물리치고 싸움을 승리로 이끌어냈던 것이다.

그런데 이 굴업도가 요즘 다시 세인의 관심을 끌고 있다. 씨제이(CJ)그룹이 굴업도의 98.5%를 사들인 후 섬 전체를 깎아 2012년까지 2564억원을 들여 18홀 골프장을 비롯해 호텔, 해양리조트, 마리나, 워터파크 등이 들어선 대규모 관광단지를 조성할 예정이라고 밝혔기 때문이다. 천박한 표현이 용서된다면 마치 죽 쒀서 개 준 꼴과 뭐가 다른가.

굴업도에 내렸다. 덕적도 진리항처럼 방문을 반기 지 않는 현수막이 여기저기 걸려 있다. 허락 없이 섬에 들어오지 말라는, CJ그룹이 세워놓은 협박성 경고문 도 유쾌하지 않다.

자동차길이 생기기 전 마을로 걸어 들어가던 숲길 이 예쁘다. 굴업도는 2009년 산림청이 우리나라의 가 장 아름다운 숲으로 선정하기도 한 곳이고, 또한 꼭 지켜야할 자연유산 환경부 장관상을 수상한 곳이기 도 하다.

굴업도 서인수 전 이장님이 운영하는 굴업도민박에 서 점심을 먹었다. 아주머니의 음식솜씨가 보통이 아 니다. 육지로 나와 음식점을 차리면 대박 날만한 솜씨 다. 하기야 음식재료의 신선함도 한몫했을 것이다. 마 을은 몇 가구 되지도 않는데 개발 반대 측과 찬성 측 으로 갈려 있다. 자본의 탐욕이 공동체마저 갈가리 찢 어 놓았다.

유구한 역사와 삶을 간직한 곳

굴업도 기행을 시작했다.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언 덕에 다시 올라갔다. 굴업도 해수욕장과 마을이 한눈 에 내려다보인다.

이세기 시인으로부터 굴업도 해수욕장 앞바다에 외롭게 떠 있는 선단여에 얽힌 남매의 전설을 들었다. 사람이 살지 못하는, 물에 잠긴 커다란 바위를 ‘여’라 고 한다. 나이든 부모와 나이 어린 남매 등 네 식구가 살고 있었다.

▲ 굴업도에 서식하는 도둑게.
세월이 지나 부모님이 죽자 다른 섬에서 혼자 외롭게 살고 있던 마귀할멈이 여동생을 납치해 가버렸다. 혼자 남게 된 오빠는 세월이 흘러 어부가 됐다. 하루는 배를 타고 고기를 잡으러 나갔다가 거센 풍랑을 만나 이름 모를 섬으로 가게 됐다. 오빠는 그 곳에서 예쁜 처녀를 만나게 되었고, 둘은 깊은 사랑 에 빠지고 말았다.

바로 그 처녀는 오래전에 잃어버렸던 여동생이었다. 이런 사실을 안타깝게 여긴 하늘은 선녀를 내려 보내 남매라는 사실을 알렸으나 두 사람 은 사랑의 결실을 맺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게 낫다며 버텼다. 진노한 하늘은 두 남매와 마귀할멈에 게 벼락을 내려 죽게 했고, 그들이 죽은 후에 세 개의 바위가 절벽처럼 솟아나게 됐다.

이 광경을 본 선녀는 붉은 눈물을 흘리며 하늘로 올라갔고, 그 후 ‘선녀 선’, ‘붉을 단’ 자를 써서 선단여로 불렀다.

밑으로 내려가니 조개무덤도 있다. 패총은 신석기 시대 유적이니 굴업도에 옛날부터 사람이 살았다는 증거다. 굴업도는 수심이 얕고 조수간만의 차이가 커 어패류 등 먹을거리를 확보하기가 쉬웠을 것이다.

사구도 아름답다. 잠시 아프리카 사막을 걷는 기분이 들었다. 굴업도는 깎여 사라지는 바위보다 훨씬 더 많은 모래를 얻는다. 한강 하구에서 공급돼 덕적군도 일대에 방대한 양이 쌓여있는 모래가 바람을 타고 이 곳으로 날아든다. 덕분에 민어 어장이 붕괴된 뒤 땅콩 농사가 주민을 먹여 살렸다.

동도와 서도를 이어주는 목기미 모래사장에는 손톱 보다 더 작은 게들이 쉼 없이 움직이며 제집을 들락거 린다. 원래 동도와 서도는 붙어있었는데 1919년 거대 한 해일이 덮쳐와 섬이 갈라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진 다.

원래 굴업도는 1920년대 초까지 해마다 백령도에 이어 민어 파시(=바다 위에서 열리는 생선 시장)가 형 성되던 어업 전진기지였다. 어선 수백 척이 모여들었 다. 부천경찰서에서 일본인 순사를 파견해 치안을 담 당했을 정도였다. 해일 당시 죽은 사람만 1000여명이 넘었다는 걸 보면 파시의 규모가 대단했다는걸 짐작 할 수 있다.

절벽에서 떨어진 쇄설암 덩어리가 해안 여기저기 놓여 있다. 화산 폭발의 흔적인데 마치 해골바가지 같 은 형상이다. 굴업도는 약 8000만~9000만년 전인 중 생대 백악기 말 격렬한 화산활동이 있었던 곳이다. 모 래밭이 바다를 가른 목기미 해변 전봇대가 모래 속에 거의 파묻히기 직전이다. 그만큼 모래가 많이 생성된다.(다음 호 에 계속)

▲ <글·사진> 신현수 / 사)인천사람과문화 이사장·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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