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현수의 걷기여행 ⑨ 단재와 벽초를 찾아서 <상편>

▲ 충청북도 청원군 귀래리에 있는 단재 신채호 선생의 사당. 입구에 '정기문'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트위터와 더불어 페이스북이 주목을 받고 있다. 특히 사오십 대들은 트위터보다는 그들의 정서에 더 맞는 페이스북에서 새로운 ‘소셜 네트워크’를 만들어가고 있다. 내 인간관계가 모두 세상에 노출된다는 점에서 약간의 거부감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인터넷처럼 어차피 피해갈 수 없는 것이라면 그것을 어떻게 잘 활용할 것인지 고민하는 게 바람직할 듯하다.

이번 기행은 페이스북에서 시작됐다. 페이스북을 통해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선배와 다시 교류를 시작했고, 선배로부터 페이스북의 그룹 쪽지를 통해 이번 기행을 제안 받았던 것이다. (일부 네티즌들은 페이스북을 우리말 ‘얼책’ 또는 ‘얼숲’으로 바꿔 부르기도 한다.)

지난 13일부터 14일까지 1박2일 동안 ‘화해평화통일교육모임’(http://cafe.daum.net/edutongil)에서 진행한 2010 평화기행 ‘단재와 벽초를 찾아서 - 청원 신채호 사당, 괴산 홍명희 생가, 괴산 산막이 옛길’에 다녀왔다. 부평에도 청주 가는 시외버스가 생겼다. 부평역 삼화고속 정류장에서 출발한다. 하루에 아홉 번이나 있어 아주 유용하다.

내려가는 길이 너무 막혔다. 버스 전용차로까지 막혀 버스도 달리지를 못했다. 수도권 시민들이 주말마다 겪는 숙명이다. 그런데도 수도권에 나를 포함해 우리나라 인구의 절반인 2000만명이 넘게 모여 살고 있다. 그래서 모두 국토의 균형발전을 원하지만 정작 자신이 지역으로 내려가 살 생각은 없다. 이날은 내려가는 길뿐 아니라 올라오는 길도 막혔다. 무슨 명절날 같았다.

평소보다 꼭 두 배가 걸려 약속장소인 청주 예술의전당에 도착했다. 난 버스를 타서 그나마 일찍 도착한 편이었다. 예술의전당은 언제 지었는지 외관이 약간 권위적일 정도로 웅장했다. 광장에는 신채호 선생의 동상도 서 있다. 점심을 먹고 나서 충북 민예총(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충북지회)에 계신 분의 안내로 청원(군)지역 기행을 시작했다.

남들이 고향이 어디냐고 물을 때마다 약간 곤혹스럽다. 청원군 가덕면에서 태어나 태를 묻기는 했지만 태어나자마자 어머니 등에 업혀 인천으로 올라왔으니, 태어난 곳에 대한 기억이나 고향 친구들이 있을 리 없다. 철든 이후, 8대 종손으로서 선친을 비롯한 조상들을 모셔놓은 산소 벌초 때와 시제 때 등 1년에 두 번 이상은 반드시 청주에 내려가고 있지만, 일만 마치면 바로 올라오곤 했다. 그래서 청주, 청원에서 기행은 사실 이번이 처음이었다.

청주 3.1공원과 민족대표 33인

▲ 신채호 선생의 사당과 그 주변 풍경.사당 앞산의 경치가 아름답다.
청주시 상당공원 안에 있는 3.1공원으로 갔다. 안내 표지판을 보니 3.1운동 민족대표 33인중 충북출신 독립유공자 손병희, 신홍식, 권동진, 권병덕, 신석구 선생 등 다섯 분의 동상을 모셔놓았다. 원래 1980년 처음 조성될 때는 여섯 명이었는데, 친일 논란이 있던 정춘수의 동상을 1996년 시민단체가 철거했다. 10여년 이상 좌대만 흉물스럽게 남아있었는데 얼마 전에 그 자리에 3.1 만세운동을 상징한 횃불 조형물을 새롭게 설치했다.

정춘수는 감리교 목사로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가했다. 그러나 당일 태화관 모임이 끝나고 관련자들이 모두 체포된 뒤에 뒤늦게 도착했고, 경찰서로 걸어 들어가 자수했다. 징역 1년 6개월 형을 선고 받고 복역했으나,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전향서를 발표한 뒤부터는 친일활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일제의 비호 아래 조선 감리교회의 수장인 감독을 지냈고, 내선일체에 철저히 순응할 것을 설교했으며,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신사참배에도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일본군을 위한 특별기도, 애국 헌금, 심지어 무기 제조를 위해 철문과 교회종의 헌납운동까지 주도했다.

해방 후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기보다는 어쩔 수 없이 일제에 협력하는 체 했을 뿐이라고 변명했다. 그런 자의 동상이 처음에 어떻게 세워졌는지 참 이해할 수 없다. 한평생을 올곧게 산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늘 권력의 유혹에 노출돼있는 지식인들은 더욱 그렇다. 권불십년인데도 권력의 단물이 계속 될 것처럼 행동하는 지식인들은 어느 시대에나 많다.

단재 선생이 어린 시절을 보낸 귀래리

▲ 항일운동을 하다 체포된 신채호 선생의 사진.
정춘수와 정반대의 삶을 살았던 청원군 귀래리 단재 신채호의 사당으로 갔다. 청주시를 둘러싸고 있는 군이 청원군이다. 행정구역 개편 얘기가 나올 때마다 두 시군을 합치자는 의견이 나오는데 잘 안 되는 모양이다.

신채호 사당에 도착하니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서산으로 기울고 있다. 귀래리는 단재 선생이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다. 신채호 선생은 1880년 12월 8일 대전에서 출생해 1936년 2월 21일 중국의 여순감옥에서 옥사할 때까지 평생을 일제에 대항해 싸웠다. 사당은 1978년에 건립됐고, 영정은 1981년에 봉안됐다. 입구에 ‘정기문’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사당 주변에는 기와를 올린 나지막한 담장이 둘러져 있고, 담장 너머 감나무는 신채호 선생이 이곳에 살았을 때부터 있었던 나무다. 사당 뒤쪽에 그의 묘소가 조성돼있다. 봉분 앞에 한용운, 오세창, 신백우 선생 등이 함께 세운 비석이 있다. 이 비석은 신백우 선생 등이 서울서부터 우마차로 싣고 내려왔다고 한다.

상석 오른쪽에는 1972년 세운 사적비가 있고, 봉분의 정면 중앙에는 명등석, 좌우에는 문인석 한 쌍이 서 있다. 다음은 내년 초에 발간될 필자의 책, ‘시로 만나는 한국근대사(가제)’ 중 신채호에 관한 부분이다.

“신채호 선생의 본관은 고령이야. 율희야! 그러고 보니 신채호 선생은 우리와 종씨구나. 같은 성과 본을 따지는 게 구태의연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런 훌륭한 분과 같은 본관이라는 게 약간 자랑스럽기는 하구나. 청원군 백족산 할아버지 산소 근처에 단재교육원이라고 있지? 충북교육청에서 운영하는 교사연수기관인데 바로 신채호 선생의 호를 따서 지은 이름이야.

신채호 선생은 1880년 11월 7일 대덕군에서 출생해서 충청북도 청원에서 성장했어. 성균관에 들어가 박사가 되었고, <황성신문> 논설위원, <대한매일신보> 주필로도 활약했어. 1910년 중국으로 망명한 그는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가했어. 1925년경부터 무정부주의를 신봉하기 시작했고 신간회를 함께 발기하기도 했지.

1922년 의열단장 김원봉의 초청을 받아 상해에 가서 ‘조선혁명선언’으로도 불리는 ‘의열단선언’을 썼어. 이 선언에서 그는 폭력에 의한 민중혁명을 주장했지. 1928년 자금 조달차 타이완으로 가던 중 지룽항에서 체포돼 10년형을 선고받고 여순 감옥에서 복역 중 1936년 옥사했어.

그는 독립이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쟁취하는 것이라는 신념으로 역사 연구에도 힘을 쏟아, ‘역사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다’라고 하면서 고조선과 ‘묘청의 난’ 등을 새롭게 해석했어. <조선상고사>, <이탈리아 건국삼걸전>, <을지문덕전>, <이순신전> 등의 저서가 있는데,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나라를 구한 위인들의 전기를 주로 펴냄으로써 나라 잃은 우리 민족에게 힘을 주려 애썼어. 유명한 일화가 있지? 일제 쪽에 절하기 싫다고 세수할 때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고 해.

무국적자와 그의 유가족들

▲ 신채호 선생의 사당이 있는 고두미 마을 입구.
여기서 신채호 선생의 호적에 대해 꼭 한마디 하고 가야겠어. 단재는 일제시절 아예 호적이 없었어. 일제가 1912년 우리 국민에 대해 일제히 호적을 만들라고 했을 때, 그는 일제의 신민이 될 수 없다는 결연한 의지로 호적을 거부했어. 단재는 조국이 광복되는 날 떳떳한 국민이 될 것을 소망했지. 하지만 놀랍게도 그는 광복 64주년인 2009년 초까지도 대한민국 국적이 아니었어. 소위 무국적자였지.

하기야 신채호뿐만 아니라 신규식, 홍범도 등 독립유공자 300여명이 모두 무국적자였어. ‘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이 개정되고, 뒤이어 ‘가족관계등록 사무처리 규칙’이 제정됨에 따라 단재 등 62명의 애국지사들이 가족관계등록부 창설을 새로 허가받았어. 비로소 무국적의 설움을 벗고 호적을 만들 수 있었지.

조국 광복을 위해 목숨을 포함해 모든 것을 바쳤던 분들의 호적이 광복 64년이 지나서야 생겼다는 사실이 너무 부끄럽지 않니? 그런데 아직도 일이 다 끝난 게 아니야. 새로 만드는 가족관계등록부에 후손과 반려자가 등재되려면 또다시 법적 소송절차를 밟아야만 한 대.

도대체 누구 덕분에 얻은 광복인데, 정작 광복의 주인공과 그 후손들이 구걸하듯 호적을 찾아야하고, 친자관계 내지 부부관계조차 법적 소송절차를 통해 회복해야한다는 말이니? 본말이 거꾸로 되어도 한참 거꾸로 된 거지. 생각할수록 너무 속상한 일 아니니?

단재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어. 그들은 단재의 친자였음에도 호적이 없으니 평생 ‘아비 없는 사생아’라는 법적, 사회적 낙인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었어. 단재가 자신의 아들들이 광복된 조국에서마저 그런 고통을 받으리라고 꿈엔들 생각했겠니.

그나마 단재와 지난 1991년에 사망한 그의 큰아들 수범은 단재의 손자가 소송을 해서 친자관계를 확인받을 수 있었지만, 두 아들의 어머니였던 단재의 부인 박자혜 여사는 ‘법률상 혼인관계를 확인할 수 없다’는 이유로 여전히 단재의 호적에 오르지 못한 채 남남으로 있어. 참 기가 막힌 노릇이지.

박자혜 여사에 대해 더 알아보자. 그는 조선총독부 부속병원의 간호사로 근무하던 중,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이 병원 조산원과 간호사들로 조직된 간우회 회원들과 함께 유인물을 배포하고, 같은 해 3월 10일 비밀리에 간우회원들을 규합해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했어. 1920년 병원을 그만두고 중국으로 건너갔어.

1920년 4월, 이회영 선생의 부인으로부터 단재를 소개받아 가정을 꾸렸고, 남편의 독립운동을 지원하며 독립운동가 아내로서의 삶을 시작했어. 1924년 신채호가 일본경찰에 체포돼 감옥에 갇히자, 베이징 등지의 독립운동가와 국내 인사들과의 연락 임무를 띠고 귀국해 ‘박자혜 조산원’을 차렸어.

1926년 12월 나석주 의사가 동양척식주식회사 폭파 의거를 일으켰을 때 안내를 맡는 등 독립지사들 간의 연락과 편의 제공에 힘썼어. 일본경찰에 여러 차례 연행돼 고초를 겪다가 1936년 신채호가 여순 감옥에서 순국한지 8년 만인 1944년, 병환으로 서거했어. MBC에서 단재의 아내이자 민족의 간호사로 살아온 ‘여성 독립운동가, 박자혜’의 일대기를 다룬 ‘독립운동, 그 절반의 이름 박자혜’를 방송하기도 했지”

도종환 선배의 시 '고두미 마을에서'

▲ 사당 옆에 설치돼있는 신채호 선생의 동상과 기념비.
단재 선생이 그나마 사후에라도 이런 정도의 사당과 묘지를 갖게 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곳의 행정지명은 청원군 귀래리인데 마을 이름은 고드미마을, 또는 고두미마을이다. 다음은 도종환 선배가 쓴 시 ‘고두미 마을에서’라는 시다.

고두미 마을에서
- 단재 신채호 선생 사당을 다녀오며

이 땅의 삼월 고두미 마을에 눈이 내린다
오동나무 함에 들려 국경선을 넘어오던
한 줌의 유골 같은 푸수수한 눈발이
동녁골을 넘어 이곳에 내려온다
꽃뫼 마을 고령 신씨도 이제는 아니 오고
금초하던 사당지기 귀래의 나무꾼
고무신 자국 한 줄 눈밭에 지워진다
복숭나무 가지 끝 봄물에 탄다는
삼월이라 초하루 이 땅에 돌아와도
영당각 문풍지를 찢고 드는 바람소리
발 굵은 돗자리 위를 서성이다 돌아가고
욱리나 냇가에 봄이 오면 꽃 피어
비바람 불면 상에 누어 옛이야기 같이 하고
서가에는 책이 쌓여 가난 걱정 없었네
뉘 알았으랴 쪽발이 발에 채이기 싫어
내 자란 집 구들장 오그려 누어 지냈더니
오십 년 지난 물소리 비켜 돌아갈 줄을.
눈녹이물에 뿌리 적신 진달래 창꽃들이
앞산에 붉게 돋아 이 나라 내려 볼 때
이 땅에 누가 남아 내 살 네 살 썩 비어
고우나 고운 핏덩어릴 줄줄줄 흘리련가
이 땅의 삼월 고두미 마을에 눈은 내리는데.

- 도종환 ‘고두미 마을에서’ 전문

신채호 기념관에 들렀다. 같이 간 일행 중 신연식 선배가 있다. 평생을 교육운동에 헌신한 국어교사로, ‘식’자 돌림이니 고령 신씨 항렬로 나에게 할아버지뻘 되는 선배다. 혈연을 따지는 건 촌스러운 일이지만 만날 때마다 생기는 반가운 마음은 어쩔 수 없다.

신채호 선생은 ‘호’자 돌림으로 선친과 항렬이 같으므로 ‘수’자 돌림인 내게 아저씨뻘이다. 조상 중에 훌륭한 분이 있다는 게 기분 나쁘지는 않다. 사당을 나오는데 벌써 사위는 어두워지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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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ㆍ사진 / 신현수 (시인ㆍ부평고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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