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현수의 걷기여행 ⑨ 단재와 벽초를 찾아서 <하편>

▲ 괴산댐에 막혀 고여 있는 물.
지난 11월 13일부터 14일까지 1박2일 동안 ‘화해평화통일교육모임’(http://cafe.daum.net/edutongil)에서 진행한 2010 평화기행 ‘단재와 벽초를 찾아서 - 청원 신채호 사당, 괴산 홍명희 생가, 괴산 산막이 옛길’에 다녀왔다.

충북 청주시 상당공원에 있는 3.1공원과 청원군 귀재리 고드미마을에 있는 단재 신채호 사당을 들른 일행은 사위가 어두워질 무렵 다음 기행지인 괴산으로 향했다. 나는 기행 동안 페이스북을 통해 이 기행을 안내 해준 김민곤 선배의 승용차를 타고 다녔다. 김민곤 선배 또한 교육운동에 일생을 헌신한 분이다.

80년대 중반, 결혼식 이듬해 와이엠시에이(YMCA) 중등교사회 사건으로 충북 단양으로 유배를 가는 등 평생을 간난신고를 겪었으나 늘 호탕한 웃음소리와 유쾌한 유머로 좌중의 분위기를 이끌어가는 선배다. 이 기행도 김민곤 선배가 주선했다. 그런데 서울부터 끌고 내려온 승용차는 15년도 넘은 중고차에 그 흔한 내비게이션도 없다. 그래서 일행을 놓쳐 몇 번이나 헤맸지만 별로 개의치 않는 눈치다. 검소하고 변함없는 삶을 사는 선배다.

괴산 홍명희 생가에 도착했다. 날은 완전히 어두워졌다. 생가에서 괴산지역을 안내해 줄 김순영 선생을 만났다. 시간이 너무 늦어 생가에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다음날 다시 와보기로 하고 3.1 만세운동 유적비로 갔다. 홍명희는 고향 괴산에서 동생들과 함께 3.1운동을 주동하다 투옥돼 1년 동안 옥고를 치르기도 했는데, 그것을 기념하는 비였다. 비는 옛 장터거리에 있었다.

저녁을 먹고 나서 다시 차를 타고 제월리 홍명희 고가로 갔다. 홍명희 고가는 벽초(홍명희의 호)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인데, 현재는 홍명희의 친척들이 집을 지키고 있다. 북에서 부수상까지 지낸 벽초 때문에 남쪽의 친인척들이 겪었던 고초는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이 집을 지키던 분은 아예 이름까지 바꿔버렸다. 고가 뒷산에 벽초의 아버지 홍범식을 비롯한 조상들의 묘가 있다는데, 날이 너무 어두워 올라가보지는 못했다.

파란만장한 5대의 가족사

▲ 괴산댐에 막혀 고여 있는 물을 바라보는 가족의 모습이 정겹다.
민족운동가이자 소설가이며, 북한의 정치가였던 벽초 홍명희는 1888년 충북 괴산에서 출생했다. 아버지 홍범식과 어머니 윤씨 사이에서 4남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부친 홍범식은 경술국치 때 가장 먼저 자결한 인물로 유명한 분이다. 홍명희는 어린 시절부터 비상한 기억력으로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으며, 일찍부터 문학적 재능을 드러낸바, 이광수ㆍ최남선 등과 아울러 ‘조선 3대 천재’로 불렸다.

금산 군수였던 아버지가 “내 아들아 너희들은 어떻게 하든지 조선 사람으로 의무와 도리를 다해 빼앗긴 나라를 기어이 되찾아야한다. 죽을지언정 친일을 하지 말고 먼 훗날에라도 나를 욕되게 하지 마라”라는 유언을 남기고 자결한 뒤, 벽초는 민족문제에 눈뜨기 시작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고향에서 동생들과 함께 충북지역 최초의 3.1운동을 주동하다 투옥돼 1년 동안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후에 신간회 결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오산학교 교장 등을 역임했으나 일제 말 협박과 회유를 피하기 위해 창작을 포함한 모든 사회활동을 그만두고 은둔에 들어갔다.

해방 후 벽초는 정치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에서 작가보다는 사회운동가 또는 정치가로 활동했다. 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한 후 그대로 북에 남았고, 남한 출신으로서는 드물게 북한 초대 내각의 부수상까지 지냈다. 한국전쟁 당시 전쟁을 끝까지 반대했다고 알려져 있다. 현재 평양 애국열사릉에 부인 민영순과 함께 안장돼있다.

벽초의 아들 홍기문도 아버지를 따라 월북한 후 김일성종합대학 교수가 되었는데 국어학사에 주목할 만한 성과를 낸 국어학자다. 벽초의 큰손자 홍석형도 현재 북한의 고위직으로 알려져 있고, 작은 손자가 벽초의 대를 이어 작가가 된, 소설 ‘황진이’로 유명한 홍석중 선생이다. 북쪽 작가 최초로 남쪽에서 제정한 만해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2006년 민족작가대회 때 북에서 만난 홍석중 선생은 키도 크고 그의 소설처럼 매우 거침없는 성격이었다.

문단에서는 할아버지로부터 이어받은 학문과 문학의 전통이 소설 ‘황진이’에서 완성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특히 이 작품은 북한 소설로는 보기 드물게 성애 장면이 솔직하게 묘사돼있어 더욱 관심을 끌었다. 그런데 벽초의 할아버지 홍승목은 친일인명사전에도 이름이 오른 친일파다. 5대에 걸친 가족사가 참으로 파란만장하다.

홍명희와 역사소설 ‘임꺽정’

▲ 괴산읍 동부리에 있는 홍명희 생가. 그의 아버지 이름을 딴 ‘홍정식 고택’으로만 표기돼있다.
고가 근처에 있는 홍명희문학비로 갔다. 충북작가회의 등 지역문인들과 사계절출판사 등이 힘을 모아 제월대 주차장에 건립했다. 문학비 앞에 전국의 문인들이 보낸 박석(=얇은 돌)이 묻혀 있다. 내가 보낸 것도 찾아보았으나 어두워서 잘 안보였다.

벽초의 문학비도 당연히 우여곡절이 많다. 보훈단체 등에서 동판을 철거해가기도 했다. ‘임꺽정’이라는 단 한 편의 소설로 민족문학사의 획을 그은 벽초의 문학을 기리기 위해 1996년부터 해마다 개최해온 홍명희문학제도 올해로 15회를 맞았지만, 보수단체 등의 반발로 지원이 끊기는 등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하고 있다. 그동안 문학제를 주도해온, 우리 기행을 안내한 김순영 선생 등이 겪은 고초는 상상 이상이었다.

홍명희의 역사소설 ‘임꺽정’은 몇 차례의 중단을 겪으면서 <조선일보>와 <조광>지 등에 13년 동안 연재됐지만 결국 끝을 보지는 못했다. 오랫동안 금서로 묶여 있다가 1985년 사계절출판사에서 이 소설을 간행함으로써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임꺽정’은 조선 명종 때 의적 임꺽정을 우두머리로 하여 황해도 일대에서 실제로 활약했던 화적패의 활동을 다룬 작품인데, 가장 천한 백정을 주인공으로 삼은 것에서 벽초가 이 소설에서 말하고자 하는 ‘역사의 주체는 민중’이라는 진보적 역사관을 짐작할 수 있다. ‘민족어의 보고’ ‘살아 있는 최고의 우리말사전’이라는 평가를 받는 미완의 소설 ‘임꺽정’은 홍석중 선생이 뒷부분을 마무리 지었다고 한다.

벽초가 이나마 남쪽에서 조명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작가대회 때 함께 방북했던 벽초 전문가인 상명대 강영주 교수의 노력에 힘입은 바가 크다. 20년 넘게 지속된 강영주 교수의 임꺽정 연구는 독보적이다. 홍석중 선생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으며 몹시 반가워했던 기억이 난다. 현재의 남북 정세로 보면 모두 꿈같은 일이지만.

‘홍명희 생가’ 표지는 괴산 어디에도 없다

▲ '산막이 옛길'. 괴산군 칠성면 외사리 사오랑 마을에서 산골마을인 산막이 마을까지 연결됐던 옛길 약 3.5km를 복원한 산책로다.
숙소에 짐을 풀고 나서 그냥 잠들 수 없어서 김순영 선생의 안내로 ‘일미집’이라는 괴산에서 가장 오래된 막걸리 집으로 가서 막걸리를 한잔 기울였다. 실내는 50년 전 그대로다. 같은 자리에서 50년 넘게 식당을 운영한 팔십이 훨씬 넘은 주인 할머니, 50여년 전 남편과 일찍 사별하고 이 식당에서 홀로 6남매를 모두 키웠다.

이 땅의 모든 어머니들은 위대하다. 다음날 이 지역의 특산 음식 올갱이국으로 아침을 먹고 어제 못 본 괴산읍 동부리 홍명희 생가로 갔다. 그런데 홍명희 생가라는 표지는 괴산 어디에도 없다. 그의 아버지 이름을 딴 홍정식 고택으로만 표기돼있다. 도로 이름은 ‘임꺽정로’라고 쓰면서 정작 임꺽정을 쓴 작자 홍명희의 이름은 불편해하는 현실, 분단이 빚어낸 비극적 현실은 아직도 엄연히 살아있다.

조선시대 중기 중부지방 양반 가옥의 특징을 가장 잘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는 홍범식 고가는 2002년 충북 민속자료 14호로 지정됐고, 홍범식 고택으로 불리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 문인들과 지역에서는 ‘홍명희 생가’란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햇볕 좋은 홍명희 생가 마당에서 사계절출판사에서 협찬한 ‘임꺽정’ 한 질을 유일한 중학생 참가자 김수민군에게 선물로 전달했다. 김군이 어른이 되었을 때는 공식적으로 홍명희 생가라는 명칭을 쓸 수 있을지.

산으로 모두 막혀있어 ‘산막이’

▲ 괴산군 제월리에 있는 홍명희 고가. 벽초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인데, 현재는 홍명희의 친척들이 집을 지키고 있다.
홍명희 생가를 나와 ‘산막이 옛길’(http://sanmaki.goesan.go.kr)로 갔다. 마라톤대회가 열리는지 사람들이 생가 앞 임꺽정로를 달리고 있다. ‘산막이 옛길’까지는 생가에서 한 30분쯤 걸렸다. 곳곳에 표지판이 잘 돼있어서 찾기가 어렵지는 않았다. 괴산댐을 치면 찾기가 쉽다.

괴산 ‘산막이 옛길’은 괴산군 칠성면 외사리 사오랑 마을에서 산골마을인 산막이 마을까지 연결됐던 옛길 약 3.5km를 복원한 산책로다. ‘산막이’란 산으로 모두 막혀 있다는 뜻이다. 왼쪽으로는 물, 오른쪽은 산인 ‘산막이 옛길’, 대부분 데크가 설치돼있고 그리 멀지도 않아 가족 모두 함께 걷기에도 적당한 길이었다.

고인돌 쉼터와 연리지를 지나 소나무출렁다리가 나왔다. 출렁다리 앞의 ‘19금 정사목’도 재미있다. 소나무 두 그루가 매우 에로틱한 자세로 엉켜 있다.

얼음 바람골과 호수전망대를 지나 나무 위에 정자를 만들어 놓은 괴음정에서 잠시 땀을 식혔다. 산막이 마을까지는 배를 타고 갈 수도 있고,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등산코스도 만들어 놓았다. 산에 올라가면 산막이 마을이 한반도처럼 보인다는데, 내 눈으로 확인하는 일은 다음 기회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산막이 옛길’에 가을이 털썩 주저앉았다.

산막이 마을에서 막걸리로 목을 축이고 출발지였던 주차장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런데 이 옛길이 많이 알려졌는지 차가 끝도 없이 계속해서 들어온다. 온 나라에 불어 닥친 걷기 열풍 때문인가? 교행이 어려울 정도로 차가 막혀 있다. 걷기 위해서 차를 타야하는, 걷는 곳까지는 차를 타고 올 수밖에 없는 아이러니한 현실.

시내로 나와 버섯찌개로 점심을 먹고, 김순영 선생의 따뜻한 배웅을 뒤로하고 괴산을 떠났다. 집에 언제 도착할지 알 수 없다. 그냥 마음을 비우는 수밖에. 길 위에서 의미 없이 소모되는 시간과 기름. 주말마다 어김없이 되풀이되는 수도권 사람들의 고속도로 위의 순례, 이 순례는 대체 언제까지 계속될까?

▲ 홍명희 고가 근처에 있는 홍명희문학비. 충북작가회의 등 지역문인들과 사계절출판사 등이 힘을 모아 제월대 주차장에 건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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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ㆍ사진 / 신현수(시인ㆍ부평고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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