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하연 시민기자의 ‘사연이 있는 클래식’ - 프란츠 리스트 (1편)

원조 아이돌 ‘내가 곧 콘서트다’

프란츠 리스트.

키가 훤칠하고 조각처럼 잘생긴 금발의 남자가 무대에 올라선다. 그는 관객을 들었다 놨다 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그를 애타게 기다리던 귀부인들은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신경을 바짝 세우고 있다. 무대에 선 그가 손수건과 장갑을 객석에 던지면, 그걸 쟁취하고자 한바탕 소란이 인다. 조각조각 잘린 손수건과 장갑을 나눠 갖는 것으로 사태는 수습되고, 한껏 흥분된 분위기에서 연주가 시작된다.

피아노를 치면서 발을 동동 구르기도 하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가 숙였다가를 반복하며 잠시도 가만있지 않는다. 피아노를 때려 부술 듯 강한 터치로 피아노 줄이 끊어지는 건 예사다. 허공에 팔을 휘젓다가 연주 마지막에는 광란에 가까운 속주를 보여주고 벌떡 일어나 극적으로 마무리하는 그의 연기와 연주에 관객은 넋을 잃었다.

그의 현란한 무대로 동시대 많은 피아니스트는 자괴감에 빠졌다. 쇼팽조차도 무대에서는 그의 경쟁자가 되지 못했으니. 그의 이런 쇼맨십에 불편해하는 순수 예술가들조차 막상 그의 무대를 보고 나면 할 말을 잃었다. 신동으로 전 유럽을 강타했던 클라라 슈만도 그의 연주를 보고 ‘우리가 고통스럽게 연습하다가 결국 포기한 부분을 그는 초견(=악보를 처음으로 봄)으로 연주했다’라며 경탄했다.(위대한 작곡가들의 삶, 444쪽)

그의 연주를 듣던 여성이 기절하는 것은 일상이었고, 어떤 날에는 연주하던 그마저 연주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기절해 악보를 넘겨주는 이의 품으로 쓰러진 적도 있었다. ‘짐이 곧 국가다’라고 한 루이 14세를 벤치마킹해 ‘내가 곧 콘서트다’라고 자신을 선전한 그는 바로 피아노의 신 ‘프란츠 리스트’다. 어딜 가나 리스토마니아(Lisztomania)라는 열광적인 팬덤을 끌고 다니는 원조 아이돌.

‘세상을 놀라게 할 신동’ 확신한 아버지

프란츠 리스트(1811-1886)는 헝가리 라이딩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아담 리스트는 에스테르하지 후작의 토지 관리자였고, 어머니 안나 라거는 청소부였다. 에스테르하지 궁에는 궁 소속 관현악단이 있었는데, 아담은 이곳에서 한동안 제2 첼리스트로 연주했다. 이 관현악단은 불과 몇 십 년 전 하이든이 악장으로 일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아담은 첼로뿐 아니라 피아노도 다룰 수 있었다. 리스트가 여섯 살 되던 해부터 피아노를 가르쳤고, 리스트는 빠르게 발전했다.

리스트가 세상을 놀라게 할 신동이라고 확신한 아담은 리스트의 손을 잡고 빈에 있는 당대 가장 유명한 피아니스트 체르니를 찾아갔다. 열성적인 아버지 덕에 리스트는 최상의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체르니는 리스트와 첫 만남을 이렇게 회상했다.

“1819년 어느 날, 한 남자가 여덟 살배기 소년을 데리고 와서 연주를 들어달라고 청했다. 아이는 얼굴이 창백하고 건강도 좋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피아노 의자에 쏜살같이 달려간 다음에는 술에 취한 사람처럼 움직였고, 저러다가 피아노에서 떨어져 바닥을 구르는 게 아닌가, 가끔씩 걱정도 됐다. 아이의 연주는 체계가 없었고 손가락을 건반 위에서 되는대로 움직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능은 놀라웠으며, 자연스러움이 있었다. 아이에게 초견 연주를 시키고 보니 하늘이 내린 피아니스트라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리스트 삶과 음악, 23쪽)

12세에 파리와 런던을 휩쓸다

13세의 프란츠 리스트 프랑수아 르 빌랑.(석판화, 1824.)

아담은 리스트를 알리기 위해 리스트가 열 살 때 프레스부르크에서 공개 독주회를 열었다. 영리한 아담은 공연 날짜를 헝가리 국회 회기가 시작되는 날에 맞췄고, 이 공연장은 권력과 재력을 가진 이들로 가득 찼다. 리스트는 헝가리 전통 의상을 입고 등장해 현란한 기교를 선보이며 무대를 쓸어버렸다. 리스트의 무대에 압도당한 귀족들이 향후 6년간 리스트의 학비를 대겠다고 나섰고, 덕분에 리스트 가족은 빈으로 이사했다.

리스트의 학비를 지원받아도 워낙 가난했기에 빈에서 생활은 궁핍했다. 체르니는 리스트의 어려운 형편을 알고 무료로 그를 지도했다. 실기 지도는 체르니가 맡았고, 화성ㆍ대위와 관현악 편곡 등 이론 지도는 안토니오 살리에리가 맡았다. ‘아마데우스’ 속 나쁜 이미지와 달리 그도 무료로 리스트를 지도했다. 이런 영향으로 리스트도 훗날 수많은 제자를 가르쳤는데, 많은 제자가 무료로 그에게 배우는 혜택을 받는다.

체르니가 베토벤의 제자였기에 리스트는 체르니의 주선으로 베토벤을 만날 행운을 잡는다. 사람들이 떠들어대는 신동의 이미지를 좋아하지 않았던 베토벤이지만, 어린(12세) 리스트의 연주를 보고 감명을 받아 리스트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리스트는 이를 평생 자랑으로 여기며 자신을 베토벤의 후계자라고 자칭하기도 했다. 이 역사적인 순간을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의 고전 시대에서 리스트가 이끄는 낭만 시대로 옮겨가는 하나의 징표로 읽기도 한다.

아담은 리스트를 모차르트처럼 만들고 싶었다. 모차르트의 아버지가 모차르트에게 그랬던 것처럼 전 유럽을 돌면서 공연으로 많은 돈을 벌 것이라고 기대했다. 기대는 적중했다. 8세에 작곡도 시작한 리스트는 12세에 파리와 런던까지 휩쓸며 승승장구했다. 영국의 <모닝포스트>는 “거장 리스트의 연주를 제대로 다루기 힘들 정도로 우리는 완전히 무력해지고 말았다”라고 평했다.

탄탄대로를 걷던 리스트에게 제동이 걸린다. 그의 매니저였던 아버지가 장티푸스에 걸려 돌연 사망한 것. 리스트 나이 16세였다.

리스트는 이제 어머니를 부양해야하는 실질적 가장이 됐다. 연일 달려온 무대 생활에 지쳐있던 그는 돈을 벌기 위해 상류층 자제를 상대로 피아노 교습을 했다. 그에게 배우고자 하는 제자는 넘쳐났고, 그중 한 명과 사랑에 빠진다. 상대는 프랑스 무역부 장관의 딸인 카롤린 드 생크리크였다. 그러나 카롤린의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혀 그녀와 헤어진 리스트는 절망했고, 이로 인해 한때 수도사의 길을 깊이 고민한다.

역사상 첫 ‘피아노 리사이틀’

리스트의 연인 마리 다구 백작 부인.(1843.)(출처 위키피디아)

1927년께 파리에 정착한 리스트는 전 유럽에서 몰려든 예술가들과 교류하면서 지평을 넓혀갔다. 특히 그에게 막강한 영향을 끼친 음악가가 세 명 있는데, 파가니니, 쇼팽, 베를리오즈였다.

1831년, 파가니니의 파리 데뷔 무대를 본 리스트는 충격에 휩싸인다. 리스트는 그 자리에서 ‘피아노의 파가니니가 되리라’ 결심한다. 파가니니는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다는 루머가 돌 정도로 귀신같은 연주 실력을 뽐내며 전 유럽을 파가니니 열풍에 빠뜨렸던 인물이다.

리스트는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독주를 위한 카프리치오를 피아노로 편곡했고, 파가니니 대연습곡도 만들었다. 파가니니 대연습곡 3번이 우리가 잘 아는 ‘라 캄파넬라’다. 파가니니 바이올린 협주곡 2번 3악장의 주제 선율로 만든 작품으로 ‘라 캄파넬라’는 ‘종’이라는 뜻이다. 마치 종소리가 귓가에 울리듯 듣기엔 매우 아름다운 곡이지만 높은 난도로 연주하기 어려운 곡이다. 리스트는 자기가 만든, 오로지 자기만 연주할 수 있는 까다롭고 화려한 곡을 선보여 관객을 흥분시켰다.

그전까지 피아니스트들은 다른 예술가들과 합동 무대를 보여주는 형식이었다면, 야심만만 우주 대스타 리스트는 오로지 혼자 그 무대를 다 채울 생각을 한다. 1840년 6월 9일, 리스트는 런던의 하노버 스퀘어에서 ‘피아노 리사이틀’을 열었다. ‘리사이틀’은 원래 시나 성서를 낭송한다는 뜻인데, 피아노를 낭송한다니. 리스트는 ‘피아노 리사이틀’을 역사상 처음으로 연 연주자다.

사랑의 도피 여행과 양보할 수 없는 경연

이렇게 잘생기고 피아노를 매력적으로 치는 남자에게 사랑은 늘 대기 중이었다. 리스트의 아버지가 리스트에게 ‘넌 여자만 조심하면 모든 일이 잘될 것이다’라고 한 유언은 괜히 나온 말이 아니었다. 베토벤도 유독 남자가 있는 여자와 사랑에 빠지곤 했는데, 리스트도 번번이 유부녀와 사랑에 빠졌다.

1833년, 리스트에게 운명의 번개가 내리쳤다. 6세 연상의 마리 다구 백작 부인을 만난 것. 마리 다구는 15세 연상의 남편과 어린 자녀 둘이 있었다. 문학에 소질이 있어 글을 썼는데, 리스트와 예술적으로 이야기가 통했는지 다음 해에 연인이 됐다. 둘은 스위스 제네바로 사랑의 도피 여행을 떠났고, 그해 12월에 둘 사이 딸 블랑딘이 태어났다.

이곳에서 리스트는 작곡에 몰두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파리가 그리워졌다. 게다가 파리에서는 지기스문트 탈베르크가 피아니스트로 이름을 떨치고 있었고, 이 소식을 들은 리스트는 자극받았다. 한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은 없는 법. 리스트는 파리로 돌아온다. 리스트와 탈베르크는 크리스티나 벨지오조 소트리불지오 공주의 살롱에서 언론의 떠들썩한 기대감 아래 양보할 수 없는 경연을 치르게 된다.(다음 회에 계속)

[참고서적] 리스트, 그 삶과 음악 | 말콤 헤이스 지음, 김형수 옮김 | 포노
대한 작곡가들의 삶 | 헤럴드 C. 손버그 지음, 김원일 옮김 | 클
피아노의 역사|스튜어트 아이자코프 지음, 임선근 옮김|포노
소설처럼 아름다운 클래식 이야기|이채훈 지음|혜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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