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하연 시민기자의 ‘사연이 있는 클래식’ - 자클린 뒤 프레 (2편)

잠들어있던 ‘엘가의 첼로 협주곡’을 깨우다

1962년, 자클린은 루돌프 슈바르트가 이끄는 BBC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함께 로열 페스티벌 홀에서 ‘성인 무대’를 치른다. 이때 그녀가 들고 나온 곡이 엘가의 첼로 협주곡이다. 긴 금발에 키가 175㎝인 자클린이 드레스 자락을 휘날리며 무대에 등장한다. 그리고 이내 치아가 훤히 드러나는 웃음을 지으면 관객은 마법에 걸린 것처럼 그녀의 아우라에 압도되고 만다. 자리에 앉아 지휘자와 눈빛을 주고받은 후, 첫 음부터 엄청난 에너지로 보잉을 시작한다.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감수성을 내뿜으며 몸을 좌우 앞뒤로 흔들다가 허공을 향해 황홀경에 빠진 표정을 지으면, 혼이 빠진 쪽은 관중이다.

자클린은 잠들어있던 엘가의 첼로 협주곡을 단숨에 대작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엘가가 1919년 이 곡을 만들고 초연했을 때 반응은 싸늘했다. 재밌는 사실은, 엘가가 이 곡을 초연할 때 첼리스트인 바비롤리는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평단원으로 객석에서 관람했다는 것. 이듬해에 바비롤리가 솔리스트로 이 곡을 연주했으나, 평가는 그리 좋지 못했다.

1965년, 거물 지휘자가 된 바비롤리는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자클린과 함께 EMI에서 이 곡을 녹음했는데, 이 앨범은 자클린을 ‘라이징 스타’에서 ‘어메이징 스타’로 번쩍 올려놓았고, 세상에서 가장 많이 팔린 음반 중 하나가 됐다. 엘가의 첼로 협주곡이 진짜 주인을 만난 것이다.

“무대에 걸어가 서면 청중들이 나를 알아보고 박수갈채를 보내며 술렁이는 관심의 소리가 들립니다. 불안하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습니다. 나는 청중들이 내 연주를 들으러 온 친구들이라 생각했고, 그러니까 아주 감동적이었어요. 나는 그냥 연주했고 연주를 즐겼어요. 첼로 음들을 생각했다면 그 즐거움을 망쳐버렸을 겁니다. 일은 다 해놓고 즐기는 거죠.” (자클린의 전기 중)

오스트리아 모차르트, 독일 베토벤, 이탈리아 비발디, 프랑스 드뷔시 등, 나라마다 쟁쟁한 작곡가가 있었던 것에 반해, 영국엔 이렇다 할 작곡가가 없었다. 하지만, 자클린의 등장으로 순식간에 영국에도 엘가라는 위대한 작곡가가 탄생한 셈이 됐다. 이러니 자클린이 전 영국인의 사랑을 받을 수밖에.

1965년, 미국 카네기 홀에서 열린 연주회에서 자클린은 역시 엘가의 첼로 협주곡으로 미국인들의 눈과 귀를 단숨에 사로잡았다. 이듬해 자클린은 모스크바로 가서 당대 최고 첼리스트인 로스트로포비치에게 레슨을 받는다. 그에게 배우기 위해 세계 유수 연주자들이 몰려들었다.

음악원에서 마지막 날, 참가자들이 장장 4시간 반에 달하는 공개 연주회를 열었는데, 자클린은 로스트로포비치가 지휘하는 학생 오케스트라와 함께 하이든 C장조 첼로 협주곡으로 피날레를 장식했다. 연주회가 끝난 후, 로스트로포비치는 “내가 만난 이 시대의 첼리스트 중에서 자네가 가장 관심이 가. 자네는 아주 멀리, 나보다 더 멀리 나갈 수 있어.” (자클린의 자서전 중)

그 이후 로스트로포비치는 자클린이 연주한 엘가의 첼로 협주곡을 듣고 난 뒤, 자신의 연주 목록에서 이 곡을 제외했다. 더 이상 완벽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영국 장미’와 ‘이스라엘 선인장’의 결합
 

첼로 협주곡을 연주하는 자클린.

모스크바에서 돌아온 자클린은 당시 음악가들의 아지트였던 푸 쑤옹의 집에서 열린 크리스마스이브 파티에 참가한다. 이곳에서 큐피드의 화살을 맞게 되는데, 그 상대가 지금은 이름만 들어도 놀라운 다니엘 바렌보임이다. 당시 자클린의 유명세에 비하면 그의 지명도는 낮았다. 자클린은 그날을 이렇게 회상했다.

“나는 덩치가 아주 컸어요. 러시아에서 다섯 달 동안 빵하고 감자만 먹고 지내온 터라 81㎏이나 나갔고, 거구가 된 기분이었지요. 내 큰 체격이 아주 신경이 쓰였어요. 그런데 작고 까무스레한 피부의 나긋나긋한 이 사람이 불쑥 들어오더니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곤 ‘당신은 연주가로 보이지 않는군요’라고 말하는 거예요. 부끄럼을 많이 타고 다소 불안정했던 나는 ‘오, 하느님. 할 일은 하나뿐입니다’라고 생각했지요. 다행히 내겐 첼로가 있었고, 나는 그걸 꺼내서 연주를 시작했어요. 그도 나와 함께 연주했고, 그때 분명 무언가 일어났습니다. 그건…. 마치 우리가 평생 함께 연주해온 느낌이었어요. 내가 다른 사람과 이 정도로 교감할 수 있다는 사실은 내게 엄청나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지클린의 자서전)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난 바렌보임은 부모님 모두 피아노를 가르쳤던 덕분에 뱃속에서부터 피아노 소리를 듣고 태어난 천재 음악가였다.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인 바렌보임은 이스라엘 출신의 유대교인이었고, 첫눈에 그와 사랑에 빠진 자클린은 망설임 없이 유대교로 개종한다.

1967년, 자클린과 바렌보임은 아랍 국가들과 이스라엘 사이 전쟁이 임박했다는 소식을 듣고 바렌보임의 부모님이 거주하는 이스라엘 텔아비브로 날아갔다. 둘은 이스라엘 국민에게 응원과 연대의 의미로 연주회를 열었다. 전쟁은 6일 만에 승리로 끝났고, 둘은 통곡의 벽 인근에서 갑작스레 결혼식을 치른다.

이 결혼은 슈만과 클라라의 결혼에 비견되면서 세기의 결혼으로 회자됐다. 예식장에는 급하게 날아온 자클린의 부모님과 남동생, 이스라엘 수상인 데이비드 벤구리온, 예루살렘 시장, 국방부 장관 등 유명인사들이 출동했다. 이 기습적인 결혼 소식을 영국에서 유일하게 전한 건 <데일리 메일>이다.

“신동이었던 자클린 뒤 프레와 지휘자이자 피아니스트인 다니엘 바렌보임이 9월에 결혼식을 올린다고 발표했지만, 그들은 예상치 못한 시기에 그곳에 있었고, 그래서 그곳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허락된 행복은 너무나 짧았다

자클린이 첼로, 피아노는 바렌보임, 주빈 메타가 더블베이스, 이츠하크 펄먼이 바이올린, 핑커스 주커만이 비올라를 들고 슈베르트 피아노 5중주인 ‘숭어’를 연주한다. 별들의 조합이 지금 봐도 놀랍기만 한데, 팀을 리드하는 듯 온화한 웃음을 띠며 자신감에 가득 찬 자클린의 모습을 보면 그의 젊음이, 연주가 영원할 것만 같다. 바렌보임과 여러 차례 협연한 자클린은 어딜 가나 숭배에 가까운 찬사를 받았다. 바렌보임도 피아니스트뿐 아니라 지휘자로서도 승승장구했다.

언론에서 떠들던 ‘영국 장미와 이스라엘 선인장’의 결합은 놀라운 결과물들을 만들어냈다. 드보르자크의 첼로 협주곡, 베토벤 첼로 소나타, 슈베르트 피아노 5중주 등, 이들이 만들어낸 음반은 지금도 명반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허락된 행복은 너무나 짧았다. 연주하다가 활을 떨어뜨리고, 현을 짚는 손끝의 감각이 무뎌졌다. 그저 정신적 문제라고만 진단이 내려진 터라 진정제와 보드카로 세월을 보내는 사이 바렌보임은 멀찌감치 자클린을 앞서갔다. 그는 달라진 그녀의 모습에 실망해 그녀의 나약함과 나태함을 끊임없이 지적했다. 견딜 수 없어진 자클린은 남편에게서 도망쳐 불현듯 언니인 힐러리에게 갔다. 힐러리는 동생을 껴안았다.

“괴로운 나날이 계속되던 어느 날, 눈을 뜨니 재키가 사라지고 없었다. 우리는 재키를 빨리 찾지 않으면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남편이 재키를 언덕 뒤편에서 찾아냈다. 그녀는 발가벗은 채 올리브 나무 덤불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멍하니 눈을 뜬 채 부들부들 떨고 있는 동생은 미친 사람처럼 보였다. 재키가 자신의 삶에 걸린 무거운 부담들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녀는 정말 미쳐버릴 게 틀림없었다.” (‘짧은 영광, 그래서 더 슬픈 영혼’ 151쪽)

언니와 함께 머문 16개월 동안 자클린은 차마 입으로 말할 수 없는 극심한 고통을 언니에게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자클린은 말도 없이 사라졌다. 힐러리는 뉴스에서 자클린이 무대에 복귀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1973년 2월, 영국 최대 연주회장인 로열 앨버트 홀에 자클린이 섰다. 주빈 메타가 지휘를 맡아 그녀의 대표곡인 엘가의 첼로 협주곡을 연주했다. 첫 소절이 시작되고 자클린의 연주가 느려지기 시작했다. 주빈 메타는 오케스트라의 템포를 늦추려 애썼다. 연주자도 보는 사람도 고통스러운 연주가 끝이 나고, 모두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알았다. 이 무대는 자클린의 고별무대가 됐다. 엘가의 첼로 협주곡으로 혜성과 같이 등장한 자클린은 엘가의 첼로 협주곡으로 무대를 내려왔다. 그녀의 나이 고작 28세였다.

도대체 어떻게 삶을 견디죠?
 

자클린과 바렌보임.

자클린의 병명이 나왔다. 다발성 경화증. 병명을 들은 자클린은 정신병이 아님에 놀랍고 반가웠다. 여기저기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이 미친 게 아니라는 희소식(?)을 전했다. 온몸이 마비되기 전까지는 그녀의 이름을 듣고 찾아온 학생들에게 첼로를 가르쳤다. 요요마와 린 하렐도 있었고, 이런 인연으로 자클린의 사후에 그녀의 악기인 스트라디바리를 요요마가 받게 됐다.

찾아오는 사람도 점점 줄어들고, 바렌보임은 전 세계로 연주를 다니느라 집에 들어오는 날이 적었다. 게다가 그는 러시아 출신 피아니스트 헬레나 바쉬키로바와 동거하며 아이까지 낳았다. 지독한 외로움 속에서 자클린은 자신의 음반을 듣는 일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눈꺼풀이 마비돼 눈물도 흘리지 못하는 상태가 된 그녀가 묻는다. “도대체 어떻게 삶을 견디죠?”

가슴이 찢어지는 엘가의 협주곡을 들으며 버티고 버티다 바람이 무척 세게 불던 1987년 10월의 어느 날, 눈을 감았다. 그의 옆에는 언니와 동생, 그리고 그녀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바렌보임이 있었다.

자클린이 떠나고 사람들은 바렌보임을 향해 분노를 쏟아냈다. 아픈 아내를 버리고 바람피우다 아내가 죽자마자 보란 듯이 재혼한 비정한 남자라고. 생각해보면 그라고 행복했을까? 사람들의 손가락질에, 스스로 느꼈을 죄책감까지. 나이 겨우 31세의 인간이 감당하기엔…. 그로서도 ‘충분’을 넘어서는 지옥의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자클린에게도 그에게도 가혹했던 시간, 죄는 모두 빌어먹을 운명에 있다.

[참고서적] 자크린느 뒤 프레 예술보다 긴 삶| 캐럴 이스 턴, 윤미경|마티
내가 사랑하는 클래식|박종호|시공사
더 클래식 셋|문학수|돌베개
짧은 영광, 그래서 더 슬픈 영혼|전원경|시공아트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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