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하연 시민기자의 ‘사연이 있는 클래식’ - 자클린 뒤 프레 (1편)

오펜바흐의 ‘자클린의 눈물’

자클린 뒤 프레. (사진출처 위키디피아)

2020년 3월 12일, 대구 문화예술회관에서 베아트리체 트리오의 연주로 ‘자클린의 눈물(Jacqueline's Tears)’이 흘러나왔다. 코로나19로 지친 대구시민들을 위로하기 위한 연주로 사정상 무관중, 온라인으로 중계됐다.

이 곡은 프랑스 오페라의 창시자 오펜바흐(1819-1880)의 곡으로, 훗날 독일의 첼리스트 토마스 베르너(1941~)가 오펜바흐의 미완성곡들을 정리하다가 발견했다. 토마스는 이 슬픈 곡을 듣고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한 사람의 운명을 떠올리게 만드는 곡이었다. 그 사람은 자클린 뒤 프레(1945-1987). 그야말로 불꽃같은 삶을 태우고 간 동시대 천재 첼리스트인 그녀를 추모하는 마음으로 곡의 이름도 ‘자클린의 눈물’이라 지었다. 이 곡은 자클린이 사망하고 1년 후에 발표됐다.

어머니 아이리스 그리프와 언니 힐러리

자클린은 1945년 영국 옥스퍼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드렉 뒤 프레는 평범한 회사원이었던 반면, 어머니 아이리스 그리프는 영국 왕립 음악아카데미에서 장학금을 받고 다닌 피아니스트로 생계를 위해 아이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친 음악가다. 졸업 후엔 가끔 왕립 음악아카데미에서 전임 교수들이 나오지 못하는 시간에 대리 교수로 학생들을 지도하기도 했다. 아이리스는 자클린이 첼로를 시작하면서 어린 딸이 볼 수 있게 직접 삽화를 그려 넣은 악보도 만들었고, 이후 자클린의 피아노 반주를 도맡았으며, 점차 딸의 로드매니저가 됐다.

신동이 태어나면 집안에 어떤 일이 발생할까? 신동을 오랫동안 연구해온 심리학자 데이비드 헨리 펠드먼은 “그것은 재능이 실현될 수 있게 부모 양쪽 혹은 어느 한쪽에게 여타의 것을 거의 포기할 의지를 요구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어쩌면 다른 자녀들을 희생하는 대가가 될 수도 있다. 다른 자녀가 똑같은 재능을 지녔다 할지라도 둘 다에게 그런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아예 불가능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뒤렉과 아이리스 사이엔 3남매가 있었는데, 모두 음악적 기량이 뛰어났다. 특히 자클린의 언니 힐러리는 뛰어난 플루트 연주자였다. 사실, 아이리스 주변 친구들은 모두 힐러리가 음악가로 대성할 줄 알았다. 하지만 자클린이라는 천재를 동생으로 둔 운명으로 힐러리는 가려졌고, 늘 동생에게 양보해야했다.

이로 인해 힐러리는 30년도 더 지난 자클린의 40회 생일을 기념한 라디오 방송에서 어린 시절 자클린과 출연한 BBC 방송을 회상하며 “엄마와 함께 3중주 연주를 하긴 했지만, 즐거운 일이라기보다는 싸움이었어요. 어쩌면 서로 질투했는지도 모르겠어요. 사람들이 재키(자클린의 애칭)의 연주를 들으러 오면 부엌에 숨었던 기억이 나요. (중략) 사람들은 저를 보며 ‘멋진 네 동생은 잘 지내니’라고 물어보곤 했지요”라고 말하며 어린 시절 상처받았던 마음을 드러냈다.

첼로와 사랑에 빠진 다섯 살 아이
 

어린 자클린 뒤 프레. (사진출처 위키디피아)

불과 생후 9개월이었을 때 손가락을 두드리며 리듬을 만든 자클린은 5세 무렵 운명의 소리를 듣는다.

“집 부엌이었는데 올려다보니 라디오가 있었어요. 다리미판을 딛고 올라가서 라디오를 틀었더니 오케스트라 악기들을 소개하고 있더군요. 틀림없이 <BBC> 방송국의 어린이 방송 시간이었을 거예요. 첼로 소리가 나기 전까지 나는 별로 느낌이 없었어요. 그런데 첼로와 난, 바로 사랑에 빠져버렸죠. 그래서 엄마에게 ‘저 소리를 내고 싶어’라고 했죠.” (자클린의 전기 중)

처음엔 자클린을 아이리스가 지도했지만, 아이리스는 금세 자클린에게 전문적인 선생님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자클린을 가르쳤던 선생님들은 자클린의 발전 속도에 빠르게 손을 들었고, 아이리스는 당시 첼리스트로 이름을 떨치고 있던 윌리엄 플리스에게 자클린의 오디션을 부탁했다. 플리스는 자클린의 연주를 듣자마자 제자로 받아들인다. 자클린은 플리스를 ‘첼로 대디’라고 부르며 따랐고, 이후 폴 토르틀리에, 파블로 카살스, 로스트로포비치 등과 같은 거장들로부터 사사를 받았으나, 늘 자신의 유일한 스승은 플리스라고 말했다.

자클린의 발전 속도는 상상을 벗어났다. “나는 음 감각이 아주 뛰어나서 음을 어떻게 찾아야 할지 알고 있었고, 그 음을 자신 있게 연주했다. 내게는 첼로 연주가 이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자클린의 전기 중)

수지아상 첫 수상자

몇 달 후, 플리스는 수지아상 수상자로 자클린을 추천했다. 수지아상에 관해 설명하면,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첼로는 금녀의 악기였다. 다리 사이에 첼로를 끼우고 앉는 자세가 여자답지 못하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이 금기를 깨뜨린 사람이 포르투갈 출신의 여성 첼리스트 귀예르미나 수지아(1885-1950)다.

수지아는 7세 나이에 첼로를 시작해 12세에 포르토 시향의 첼로 파트를 이끌었으며, 17세에 솔로로 데뷔해 여성 최초로 이름을 떨친 연주자이며 현재 음반으로 들어볼 수 있는 여성 최초의 연주자이기도 하다. 격정적인 연주 스타일로, 그녀에겐 ‘첼로의 헤라클래스’란 닉네임이 따라다녔다.

천재들은 한 세기 안에 머물면 어떻게든 연결이 되나 보다. 수지아는 첼로의 거장 파블로 카살스(12세 연상)를 만나 7년 동안 폭풍 같은 사랑을 나눴으나, 끝내 그의 청혼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수지아가 사망하고, 훗날 파블로는 수지아상의 첫 번째 수상자가 된 자클린을 가르치게 됐으니, 수지아와 자클린은 보이지 않게 연결된 셈이다.

1912년, 영국으로 온 수지아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고 1950년에 사망했다. 당시 자클린은 5세였다. 수지아는 자신의 악기인 스트라디바리우스를 팔아 국적과 관계없이 일류 연주자가 될 잠재력을 소유한 21세 미만 연주자에게 상을 수여하라는 유언장을 작성했고, 그로 인해 수지아상이 만들어졌다.

1956년, 수지아상 첫 오디션이 왕립 음악아카데미에서 열렸다. 지원자 5명이 참가했고, 참가자 중 가장 어린 자클린은 겨우 11세였다. 심사위원으로 참가한 첼리스트이자 지휘자인 존 바비롤리는 다른 심사위원들에게 플리스가 보낸 추천서를 읽어줬다.

“그녀는 지금까지 내가 만난 연주자 가운데 첼로와 음악적 면에서 가장 뛰어나며, 거기에다 정신의 성숙함까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는 그녀가 가장 뛰어난 첼리스트가 될 것이며 이를 위해 모든 조력을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리스의 반주에 자클린이 연주를 시작하고 2분도 채 되지 않아 바비롤리 입에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바로 이거야!” 심사위원은 아니었지만 수지아와 함께 협연했던 피아니스트 제럴드 무어도 그 자리에 있었는데, 그는 “엷은 황갈색 머리의 어린 소녀가 우리에게 연주를 들려줬을 뿐 아니라 우리를 아연실색하게 했다. 그녀의 키는 첼로만큼도 되지 않았다. 청중은 짜릿한 전율을 맛보았다.”

‘열여섯 살의 놀라운 첼로 천재’
 

어거스트 에드윈 존(1878-1961)이 그린 귀예르미나 수지아.(사진출처 위키디피아)

수지아상 첫 번째 수상자는 자클린이 됐고, 이 덕분에 자클린은 이 재단의 후원으로 수년간 돈 걱정 없이 최고 수준의 첼로를 배우게 된다. 이 수상은 그녀에게 첼리스트로서 급성장하는 기회를 가져다줬지만, 이를 계기로 또래 친구들과는 영영 멀어졌다. 어린 자클린에게도 우정과 마음을 나눌 친구가 필요했지만, 또래 아이들에게 자클린은 그저 질투나 찬탄의 대상일 뿐 개인적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이는 자클린에게 평생 상처로 남았다.

1961년, 런던에서 가장 오래되고 아름다운 위그모어 홀에서 자클린의 독주회가 열렸다. 이 연주를 위해 그녀의 후원자 홀런드 여사는 1673년에 제작한 스트라디바리(당시 시가 3만5000파운드)를 선물했다. 550석의 홀은 만원이었고, 역사적인 연주가 시작됐다. 헨델의 G장조 소나타를 시작으로 바흐 무반주 첼로, 브람스, 드뷔스 소나타 등을 연주했다. 스승 플리스는 “그녀의 연주는 단순히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이었다. 그녀는 각각의 작품을 정말 완벽하게 살아나게 했다. 사람들은 실제로 울고 있었다.”고 평했다.

<타임즈>에 ‘열여섯 살의 놀라운 첼로 천재’라는 제목으로 논평이 실렸는데, 그 내용은 이랬다. “자클린 뒤 프레 양은 열여섯 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렇게 어린 연주자라고 믿기 어려운 기량을 가졌기에 그녀의 공연 논평을 쓰면서 전도유망을 언급한다는 것이 모욕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뒤 프레는 이미 자신의 악기인 첼로를 완전히 지배하고 있었다.”(다음 회에 계속)

[참고서적] 자크린느 뒤 프레 예술보다 긴 삶|
캐럴 이스턴 지음, 윤미경 옮김|마티
내가 사랑하는 클래식|박종호 지음|시공사
더 클래식 셋|문학수 지음|돌베개
짧은 영광, 그래서 더 슬픈 영혼|전원경 지음|시공아트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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