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영기 선생의 인천 섬 기행
연평도(중)

낭까리봉과 거북바위

낭까리봉.(송곳바위, 아이스크림바위)

망향전망대를 내려와 오른쪽으로 해안을 바라보고 철책을 따라가다 보면 통문이 나온다. 낮에는 보통 통문이 열려있는데 혹시 닫혀있으면 통문에 달린 벨을 누르고 전화기로 신분을 밝히면 열어준다. 이곳에는 낚시하는 주민도 간혹 들어온다. 통문을 들어가 오른쪽으로 해안선을 따라 굽이를 돌아가면 그 끝에 우뚝 솟은 낭까리봉이 있다.

송곳처럼 끝이 뾰쪽하게 생겼다고 해서 ‘송곳바위’로도 불리는데, 추운 겨울에 파도가 날려 바위에 붙고 눈이 녹아 얼면 마치 아이스크림 모양과 같다 해서 ‘아이스크림바위’라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이놈 참 묘하게 생겼다. 그 오른쪽 밑으로 보면 거북 모양을 하고 있는 ‘거북바위’가 있다.

바위 하나가 거북 형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에 각도가 바뀌면 거북바위를 알아볼 수 없으니 잘 살펴야 찾을 수 있다. 마을 사람들은 십장생에 속하는 동물형상이라 해서 신성시하고 있다. 갑자기 김수로왕을 맞이하며 부른 구지가가 떠오른다.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어라. 만약 내어놓지 않으면 구워서 먹으리라.’ 거북 머리는 우두머리를 상징하기도 하지만 힘을 상징하기도 한다. 연평도의 힘을 상징하는 자연물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망향대 아래 통문.
거북바위.

계속 해안을 따라 새마을리 쪽으로 걷는다. 해안 오른쪽 방파제 뒤로 사격장에서 총 쏘는 소리가 들려 길을 가는 내내 긴장되며 몸에 전율이 흐른다. 혹시 유탄이라도 날아올까 겁이 나는 것이리라. 이곳 길은 권하고 싶지 않다. 길이 없어 계속해서 해안의 부서진 돌들을 밟고 걸어야하기에 잘못하면 발목을 삘 수도 있다.

해안선을 따라 바다에는 쇠파이프가 박혀있다. 이것을 연평도에서는 용치(龍齒)라 부른다. 용치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적의 기계화 군대를 방어하기 위해 만든 시설물인데, 여기서는 배 상륙을 저지하기 위한 시설물로 설치했다.

기형도 공원

기형도공원.

새마을리 앞에 기형도 시인을 기리는 작은 공원이 있다. 분명 안내판에 옹진군이 찍혀있는데도 2015년에 자료집을 만들 때 담당공무원은 이곳에 기형도를 기리는 공원이 있는 것조차 몰랐다고 한다.

기형도는 1960년 연평도에서 태어났고 1964년에 일가족이 시흥군 소하리로 이사했기에 연평도 추억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는 대학시절 윤동주 문학상을 수상했고,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안개’가 당선되면서 문예지에 시를 기고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1989년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유고 시집으로 ‘입 속의 검은 잎’과 산문집 ‘짧은 여행의 기록’ 등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 보면, ‘기형도의 시는 자신의 개인적 상처를 드러내고 분석하는 데서 시작된다.

가난한 집안 환경과 아픈 아버지, 장사하는 어머니, 직장을 다니는 누이 등 어두웠던 어린 시절의 기억은 그의 시에서 원체험을 형성하고 있다. 그의 시는 우울과 비관으로 점철돼있는데, 거기에는 개인적인 체험 외에 정치 사회적 억압이 간접적인 원인으로 자리하고 있다’라 평하고 있다. 공원 목판에 쓴 그의 시 ‘꽃’을 소개한다.

‘내 / 영혼이 타오르는 날이면 / 가슴 앓는 그대 庭園(정원)에서 / 그대의 / 온 밤 내 뜨겁게 토해내는 피가 되어 / 꽃으로 설 것이다. // 그대라면 / 내 허리를 잘리어도 좋으리 // 짙은 입김으로 / 그대 가슴을 깁고 // 바람 부는 곳으로 머리를 두면 / 선 채로 잠이 들어도 좋을 것이다.’

우연히 찾은 간통

우연히 찾은 간통.

새마을리 앞에서 책섬으로 가기 전 큰지리와 작은 지리 사이에 양식장이 있다. 물이 빠지면 주민들은 경운기를 끌고 가서 굴을 따기도 하고 소라ㆍ조개ㆍ바지락ㆍ낙지 등도 잡는다. 이곳에 갯벌체험장을 만들면 좋겠다. 2006년에는 배에서 싸움이 붙어 크게 다친 중국 어부가 이곳으로 무단 상륙해 육지로 후송한 일도 있었
다.

연평도는 1968년까지 조기 파시가 열려 배 3000여 척이 각지에서 들어와 황금어장을 이뤘다. 이때 잡은 조기가 수억 마리로 육지로 운반하기 위해서는 소금에 절여 간통에 보관해야만 했다. 2015년에 연평도에 갔을 때 간통을 보고 싶어 물어봤는데 남아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고 했다.

그러다 한 주민이 간통이 남아있는 것을 기억해 내고 깜깜한 밤에 차로 안내했다. 간통을 흙으로 메우고 그 위에 배추와 파를 기르고 있었다. 향토문화유산이 될 것 같으니 빨리 신고하고 복원하는 방법을 생각해야겠다고 했다. 결국 2017년에 국립민속박물관 민속연구과에서 이 간통을 조사하고 학술조사 보고서를 발간했다.

삼형제바위를 지나 동방파제 매립지로

일출 전 보았던 황홀경.
작은지리 사이에 있는 양식장.

부두 쪽으로 계속 길을 가다보면 연륙교가 나오고 그 너머에 삼형제바위라고도 불리는 책섬이 보인다. 섬이 세 개가 나란히 서있는데 제일 큰 앞섬이 맏형, 둘째, 막내가 점점 작은 모습으로 서있다. 책섬이라고 부르는 건, 섬이 파도에 쓸려 바위가 책을 포개놓은 모습과 같아서인 것 같다.

책섬을 따라 방파제로 가다보니 동방파제 매립지가 나온다. 매립지는 원래 부두로 사용하려고 했는데 공사가 잘못돼 그냥 방치돼있다. 이곳을 유락단지로 만들면 좋겠다. 갈대가 우거진 곳에 테마학습장이나 여유롭게 쉬며 사진도 찍는 장소로 만들면 많은 사람이 찾을 것 같다.

매립지가 끝나는 곳에 하얀 구조물이 나오는데, 꼭대기에 사이렌을 달은 것 같다. 그 앞에 분홍색 등대가 있는데, 현재 사용하지 않고 있다. 아마도 매립 후 방파제를 바다 쪽으로 길게 연결하고 그 끝에 새로 등대를 세우면서 이곳은 폐쇄한 것 같다. 문이 열려 올라가보니 창으로 매립지와 낚시하는 사람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방파제 너머로 떠오르는 일출이 장관이다. 아니 일출 전 바다를 온통 불사르는 모습이 더 매혹적이다. 새벽에 일출 사진을 찍으러 나갔다 만난 황홀경에 다리가 붙박여 자리를 뜰 수 없다.

연평읍 내 벽화와 사진들

조기파시 때 어선 3천 척이 장관을 이룬 모습.

연평읍 내 벽화와 사진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거의 대부분 연평도 조기 파시와 관련돼 있다. 하루 여정을 마치며 벽화를 따라 마을 곳곳을 누비는 것도 좋을 듯하다. ‘돈을 물고 다니는 개’ 벽화가 재미있다. 급하게 해변에서 뒷일을 보고 닦을 것이 없어 돈으로 닦고 버리면 이를 개들이 물고 다녔다고 한다.

조기잡이 철이 되면 국내 각지에서 어선 3000여 척이 몰려들어 조기 수억 마리를 잡았다니 머릿속에 도무지 그 장관이 그려지지 않는다. 그만큼 재화가 넘쳐났고 연평도에 주막 100여 개가 세워져 흥청망청했으며, 조기 파시 때 열린 시장은 명동거리처럼 번성했다. 그때 모습을 알 수 있게 마을 벽에 사진을 인화해놓았다.

1968년 파시를 끝으로 조기잡이는 거의 끝났고 현재는 꽃게잡이가 주업이 됐다. 그런데 북방한계선(NLL)에서 중국어선이 게마저도 싹쓸이해 매해 수확량이 준다고 한다. 5월 중순과 11월 초순에 연평도 평화기행을 안내했는데, 중국어선의 싹쓸이로 이미 꽃게는 파장했다. 냉동 창고에 가봤는데 10여 박스 외에는 없다. 꽃게잡이는 4월 초순~6월 하순, 9월 중순~11월 하순에 하며, 씨알이 굵고 맛이 좋은 연평도 꽃게를 최상품으로 친다.

연평도 주민들의 소원대로 남북공동어로구역을 조성하고 NLL에 해상 파시를 열길 기원한다. 그러면 한반도 평화도 증진하고 중국어선을 몰아내 어족자원을 보호할 수 있다.

그물에서 꽃게를 걷어내는 작업.
연륙교와 책섬, 동방파제 매립지.

 



※ 천영기 선생은 2016년 2월에 30여 년 교사생활을 마치고 향토사 공부를 계속하면서 시민들과 함께 월 1회 ‘인천 달빛기행’과 때때로 ‘인천 섬 기행’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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