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평도, 평화와 상생의 섬으로(상)
연평도, 평화와 상생의 섬으로(상)
  • 천영기 시민기자
  • 승인 2019.12.02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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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영기 선생의 인천 섬 기행
연평도(상)

[인천투데이 천영기 시민기자] 연평도는 대연평도와 소연평도로 나뉘어있는데, 대연평도는 인천에서 서북쪽으로 약 83.2㎞ 떨어져 있다. 대연평도 남쪽으로 약 5.2㎞ 지점에 소연평도가 있다. ‘고려사’와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의 문헌에는 연평(延平)ㆍ연평평(延平坪) 등으로 표기돼있는데, 섬 지형이 대체로 평탄하고 들판처럼 길게 뻗어있어 유래한 지명이라고 한다.

연평도는 남북 관계가 악화될 때마다 분쟁이 일어난 곳이다. 1999년 제1 연평해전, 2002년 제2 연평해전, 2010년 연평도 포격사건으로 군인 8명이 전사하고 28명이 중경상을 입었으며 민간인도 2명이 사망했다. 이런 분쟁의 틈을 비집고 중국 어선들이 북방한계선(NLL)을 따라 들어와 저인망 어선으로 바다를 훑어 어자원의 씨가 마르고 있다. 심지어 어장이 황폐화되고 백화 현상까지 일어나고 있다. 이제 상생의 지혜를 발휘할 때다. 남북이 협력해 공동어로를 설정함으로써 서로 번영을 꿈꿔야한다. 서해 평화와 상생이 인천으로, 한반도로 울려 퍼지기를 기대해본다.

종합운동장 포탄 맞은 담벼락.
종합운동장 포탄 맞은 담벼락.

연평도로

인천 연안여객터미널에서 연평도에 처음 들어갈 때는 바람이 많이 불었다. 파고가 높아 카페리호가 울렁이며 바닷길을 껑충껑충 뛰어간다. 멀미할 정도는 아니지만 배에서 내려 땅을 밟자 바닥이 가볍게 출렁인다.

배표를 예약해야하기에 미리 월간 날씨를 점검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렇다고 날씨가 일기예보와 꼭 맞는 것은 아니니 그냥 복불복이라 해야 할 것 같다. 배 안에서부터 귀대하는 군인들이 많아 긴장감도 감도는 것 같지만, 연평해전과 포격사건 때문에 지레 겁을 집어먹은 것이리라. 하긴 연평도 주민 1800여 명에 군인과 그 가족이 1200여 명 된다니 최전방은 맞다.

연평도를 여행하려면 우선 민박집을 잡을 때 차량 지원이 가능한지 알아보는 것이 좋다. 2박 3일 이상의 여정일 경우는 걸으면서 여유롭게 구석구석 다 찾아볼 수 있지만, 1박 2일의 경우 배 시간 때문에 중간에 차를 타지 않으면 다 돌아보기 힘들다. 1박 2일 코스는 망향전망대와 평화공원 방향 두 곳으로 나눠 하루씩 살펴보는 것이 좋다.

임경업 장군을 모신 충민사

숙소에 짐을 풀고 바로 충민사로 갔다. 충민사는 면사무소 옆 언덕 위에 있다. 돌계단부터 신경 써서 꼼꼼하게 쌓았다. 그만큼 충민사가 연평도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크리라. 계단을 올라 충민사 앞에 서면 연평도 앞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향토유적 제3호로 지정돼있는데 임경업 장군(1594~1646)을 모신 사당이다. 평상시에는 사당 문에 자물쇠가 걸려있어 면사무소에서 열쇠를 빌려 열어야한다.

임경업 장군이 연평도에 왔다는 문헌 기록은 없고 전설로만 전해진다. 임경업 장군이 중국으로 가던 도중 식수와 부식을 싣기 위해 연평도에 잠시 정박한다. 장군은 지금의 안목어장에 가시나무를 꽂게 해 간조 때 고기를 많이 잡게 했다. 이때 잡은 물고기의 머리에 흰 돌 같은 것이 박혀있어 이를 석수어(石首魚)라 했으며, 기운을 북돋는 효험이 있어 ‘조기(助氣)’라고 불렀다. 여기서 조기잡이가 유래됐단다. 그래서 연평도 주민들은

연평도 지도. / 12-05기적의 성모상. / 해송정에서 바라본 책섬과 선착장. / 충민사 사당 건물. (사진 왼쪽부터 반시계 방향)
연평도 지도. / 12-05기적의 성모상. / 해송정에서 바라본 책섬과 선착장. / 충민사 사당 건물. (사진 왼쪽부터 반시계 방향)

임경업 장군을 ‘조기의 신’이나 ‘어업의 신’이라 불렀다. 지금도 안목어장에선 가시나무를 꽂아 고기를 잡는다. 임경업 장군이 역모에 휘말려 억울한 죽임을 당하자, 연평도 주민들은 이곳에 사당을 짓고 장군을 어업 수호신으로 믿으며 매해 전체 주민이 참여해 풍어제를 지냈다. 물론 출어할 때나 귀향할 때도 꼭 이 사당을 찾아 참배를 올리며 풍어와 안전한 항해를 빌었다고 한다. 임경업 장군의 발자취는 ‘볼음도’의 섬 이름에도 남아있다. 장군이 중국으로 가다가 풍랑을 만나 15일간 머물며 둥근달을 보았다고 해서 만월도(滿月島), 후에 둥근달인 보름달을 소리대로 적어 볼음도(乶音島)라 했다고 한다. 이곳에도 임경업 장군을 모시는 당집이 있다. 연결성이 확인된다.

임경업 장군 관련 기록에서도 확인되는 바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임경업은 1643년 5월 26일 김자점의 종이었던 상인무금(일명 효원)의 주선으로 배 한 척과 사공 10명, 그리고 그의 군관이었던 이형남ㆍ박수원(일명 차자룡)과 일찍이 사귀어온 임성기ㆍ최수명 두 승려(일설에는 지명ㆍ소명)를 대동하고 상선을 가장해 서울의 마포(일설에는 태안)를 출발해 황해로 나갔다. 그해 가을 중국 제남부의 해풍도에 표착했다.”

이 내용을 볼 때 중국까지 4~5개월은 걸렸다는 것인데, 실제로 중국으로 가면서 볼음도에서 태풍을 만나 머물고 연평도에서는 식수와 부식을 실었을 것이라는 개연성이 충분히 있다. 학자들이 연구해야할 부분이다.

해송정에서 조망

충민사에서 내려와 해안도로로 가니 종합운동장이 나오고, 길에 포탄을 맞은 흔적과 담장에 포격을 맞은 구멍을 볼 수 있다. 포탄 맞은 자리는 평화를 기원하는듯 두 손을 활짝 벌린 벽화가 그려져 있다. 바닷가에 있는 정자 동진정을 지나 연평안보수련원(옛 연평중ㆍ고등학교)을 지나니 연평도천주교회가 나온다. 사제관과 교회에 포탄이 떨어져 파손됐는데 성모상은 고스란히 남아있어 ‘기적의 성모상’이라 부른다. 교회 뒤쪽 동산에 해송정이 보인다.

1957년 중앙정보부 감찰계장인 연평도 출신 김철순이 형을 만나러왔다가 연평도를 위해 써 달라며 기부금을 전달하자, 주민들의 의견을 모아 이곳에 해맞이를 위한 해송정을 지었다. 이후 주민들이 정초나 대보름에 해맞이 또는 달맞이를 위해 이곳에 올라 소원을 빌었다. 그러다 연평도 포격사건으로 산불이 나고 주변이 소실돼 2015년 3월 정자 형태의 쉼터 공간으로 현재와 같이 지었다. 이곳에서 조망이 아름답다. 책섬, 소연평도,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민간인 희생자 추모비.
민간인 희생자 추모비.

서정우 하사 산화지와 민간인희생자추모비

고(故) 서정우 하사 산화지로 발길을 옮겼다. 서정우 하사는 2010년 11월 23일 병장 마지막 휴가를 가기 위해 부두에서 배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던 중, 북의 포 공격이 시작되자 휴가 인솔 부사관의 복귀명령에 따라 차량을 타고 부대로 복귀 중이었다. 이때 북의 2차 포격으로 인해 다른 동료 2명과 내려서 인근 방공호로 몸을 피하려다 방공호를 300여 미터가량 남겨놓고 인근에서 터진 포탄 파편에 맞아 숨졌다. 해병대 모표가 소나무에 박혀 이날의 참상을 증언하고 있다. 이에 표지판을 만들어 서정우 하사를 기리고 있다.

망향대로 가는 길 우측으로 민간인희생자추모비가 쓸쓸하게 서있다. 연평도 포격사건 때 군부대 관사를 신축 중이던 김치백ㆍ배복철 씨가 민간인 신분으로 최초로 희생당했는데, 1주년 행사 때 국민 성금으로 건립한 비다. 이 언덕 너머에 관사가 있다.

망향전망대에 올라

망향전망대를 오르면 탁 트인 공지에 날렵한 망향비가 한눈에 들어온다. 마치 그리움에 목을 길게 빼고 먼 고향땅을 바라보는 형상이다. 그리움이 사무쳐 돌이 된 망부석, 한껏 목을 뒤로 휘어 튕겨 나갈듯한 자세로 말 없이 서있다. 이곳은 실향민들이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날이 맑으면 해주에 있는 시멘트 공장의 연기까지 볼 수 있다고 한다.

망향비 기단석에는 황송문 교수가 지은 ‘망향가 2’의 시구 중 일부가 적혀있다. ‘어매 뜨거운 心情(심정)이 살아 / 母性(모성)의 피 되어 가슴 절절 흐르네! // 어매여, 시골 울 엄매여! / 어매 잠든 고향 땅을 / 내 늘그막엔 밟아 볼라요!’

망향전망대 망향비. / 서정우 하사 산화지. / 망향전망대 아래 중국 어선들. / 연평도 천주교회. (사진 왼쪽부터 반시계 방향)
망향전망대 망향비. / 서정우 하사 산화지. / 망향전망대 아래 중국 어선들. / 연평도 천주교회. (사진 왼쪽부터 반시계 방향)

나도 이북5도민의 자녀로 태어났기에 어려서부터 고향을 그리워하는 절절한 심정을 안다.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고향,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가족. 피맺힌 절규를 당사자가 아니면 누가 알겠는가.

망향비 왼쪽 아래로 중국 선단이 넓게 펼쳐져 자리를 잡고 있다. 왼쪽으로 보이는 섬이 북한 수역의 갑도, 가운데 먼 곳이 연평도 포격을 한 장재도, 오른쪽 섬이 석도다. 망원경으로 보니 어부들은 보이지 않는다. 낮에는 잠을 자고 고기들의 활동이 왕성한 저녁에 조업한단다. 중국 어선들은 NLL 남쪽 우리 구역에서 조업하는데, 누구도 단속을 못한단다.

분명 우리 해역인데 우리 어선들은 출입을 못한다. 우리는 참으로 묘한 나라에 살고 있는 것 같다. 내 땅 내 해역이지만 어민들의 주장과 권리를 정부가 꽁꽁 동여매고 있다. 외지에서 들어온 내가 이렇게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화가 치밀어 오르는데, 이곳 바다에서 생업을 하는 연평도 주민의 심정은 어떠할까.

연평도 주민들의 소원은 이곳에서 낚시를 해보는 것이란다. 오죽했으면 이런 소원을 가졌을까? 그래서 그들은 이곳을 남북에 실질적 도움이 되는 ‘남북 평화 공동어로 구역’으로 만들고 싶어 한다. 그래야 중국어선들, 특히 저인망으로 어족자원의 씨를 말리고 훑어버린 펄로 인해 해삼ㆍ전복 등의 양식도 초토화되는 상황을 막을 수 있다고 한다. 내 땅도, 해역도 주장하지 못하는 이상하고도 묘한 나라에 살고 있다.

※ 천영기 선생은 2016년 2월에 30여 년 교사생활을 마치고 향토사 공부를 계속하면서 시민들과 함께 월 1회 ‘인천 달빛기행’과 때때로 ‘인천 섬 기행’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