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부평지킴이 - 산곡신용협동조합

1987년 어느 날 한 노파가 막 새 단장한 산곡신용협동조합의 문을 열고 들어서더니 다짜고짜 돈을 갚으러 왔으니 어서 정리해달라고 난리다. 영문을 모른 채 현 산곡신협 여선구 이사장과 김용렬 전무를 비롯한 당시 직원들은 멀뚱하니 그 할머니를 쳐다만 볼 뿐이었다. 얘기는 지금은 이 세상에 안 계시는 이명자라는 성함의 할머니가 70년대 초에 산곡신협에서 3000원을 빌려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이 할머니는 다짜고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신협에서 빌려간 돈이 있어 갚으러 왔으니 이자까지 계산해서 정리해주쇼. 내 그래야만 편히 눈감고 갈수 있을 것 같수다. 신협에서 서로 어려운 사람끼리 도와주고 그러면서 사는 건데 도움은 받았지만 여태 형편이 그렇지 못해 이제 사 찾아와 면목은 없으나 내 이 돈을 갚고 죽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소”

▲ 산곡신협 여선구 이사장.
당시 중간 실무책임자(현 부장급)였던 여선구 이사장은 웃으며 당시를 회상했다.

“우린 기한이 지난 것이라 원장도 다 소각해 버리고 없고 해서 할머니한테 그냥 가시라고 했는데도 떼를 쓰며 정리해야 된다고 하는 게야. 그러면서 우리한테는 없는 대출 통장까지 보여주더라고. 그래서 결국 이자까지 해서 오천얼마에 정리해드렸어. 아마 그러고 나서 나간 밥값이 대출 상환액보다 컸을 걸”

그날 정리한 이 할머니의 통장은 현재 신협에서 보관하고 있다. 
산곡신협에서 이 같은 일화는 이 할머니뿐이 아니다.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가가호호 방문을 하던지, 아니면 논밭에서 일하고 있는 조합원들을 만나 적금을 받고 손으로 기록하고, 대출금 역시 그렇게 받던 시절이었다. 그 때가 불과 30여년 전인 70년대 이곳 산곡동의 모습이었다.

대출금을 받으러 갔다가 사는 형편이 너무 어려운 걸 보고는 돌아서서 오히려 쌀을 사다가  가져다주곤 했다. 지금도 산곡신협은 조합원과 지역에 기여하는 신협이 되기 위해 다양한 지역사업을 펼치고 있다.

신협은 궁핍한 삶 극복하려 시작한 협동조합운동

산곡신협의 이 같은 특성은 설립 때부터 면면히 내려오는 전통이다. 한국전쟁 직후 구호물자 없이는 생존이 어렵던 시절, 구호물자를 두고 다투던 때라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협동조합운동이 필요하다 여겨 1960년 부산에서 처음 신협이 만들어졌고, 이후 5년 뒤 부평신협(5월)과 산곡신협(9월)이 만들어졌다.

당시 34명이 4200원을 모아 설립한 산곡신협은 다른 신협의 모태가 성당 이었던 것처럼 지금의 산곡성당이다. 그때는 산곡성당이 아니라 부평1동성당 산곡동 공소였고, 산곡성당이 된지는 올해로 38년이다.

이에 대해 여선구(66) 이사장은 “내게는 형님뻘 되는 분들인데, 당시 천주교 교우 청년들이 출자금을 모은 거야. 나는 설립 후 재무부 인가를 받을 때(1972년)부터 임원으로 일하기 시작했지. 그때는 직원이 없었어. 사무실 없어서 신협회관 준공 때(1977년)까지는 성당에 책상 하나 가져다 놓고 일했는데 뭘. 직원 채용은 성당에 김원선(작고) 신부님이 오고 나서 시작 됐어”라고 회상했다.

고(故) 김원선 신부는 산곡신협의 기틀을 만들었다. 교구로부터 받은 본인의 활동비 전액을 털어 새로 채용한 직원의 월급으로 쓰게 했다. 직원 말고는 모두들 월급 없이 뛰어다니던 때였다. 신협을 키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산곡동 주민들의 궁핍한 삶을 협동조합운동을 통해 극복하기 위해 뛰어다녔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기틀이 닦였고, 이후 신협운동가라 할 수 있는 원민구(65) 전 이사장이 18년 동안  산곡신협의 이사장을 맡으며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생필품이 귀하던 때라 성냥공장, 비누공장, 밀가루공장 등을 돌며 구입해와 산곡동 주민들에게 저렴하게 팔면서 신협을 운영해갔다. 그리고 협동조합운동에 대해 교육을 받아야 조합원 자격을 줬다. 

지금처럼 이자율을 보고 돈을 맡기던 때가 아니었다. 신협을 설립할 때만 해도 지금의 산곡동뿐만 아니라 부평의 아파트단지와 공단은 거의 다 논밭이었던 시절이었다. 부평시장이 커진 것은 공단이 조성되면서부터니, 장을 보러갈 때는 고개를 넘어 갯골(현 인천교 부근)에서 뱃삯 20환을 내고 인천(현 동인천)에서 장을 봐오던 때였다. 그러고 보니 지금의 장고개는 인천으로 장을 보러가기 위해 넘었던 고개라 붙여진 이름이기도 하다.

산곡신협의 역할은 마을에서만 그치지 않았다. 협동조합운동의 사례를 이웃으로 전파하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신협이 지금의 계양신협(당시 효성신협)이다. 효성신협 창립 시 교육을 맡기도 했지만, 당시 효성신협 직원들의 급여를 1년간 산곡신협에서 지원해줬다.

지금, 앞으로도 지켜야 할 협동조합운동의 원칙

14만원의 월급을 받으며 85년 신협에 들어온 김용렬씨는 어느덧 전무가 됐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는 여전히 신협의 협동조합운동 원칙을 맨 앞에 둔다. 그는 “신협이 은행에 점차 가까워지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신협이 금융기관으로써 튼튼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협동조합운동의 원칙에 부합되게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것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산곡신협은 지난 2005년 창립 40주년을 맞이했다. 어느덧 45주년을 향하고 있다. 세월의 흐름 속에, 도시의 변화 속에 산곡동 주민들과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해온 산곡신협이다. 21세기 신협의 새로운 협동조합운동의 모습을 이곳 산곡신협에서 그려봤으면 하는 바람이다.

▲ 산곡신협은 여름에 방역활동도 전개했다. 사진은 1997년 당시 방역활동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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