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떠나는 홍길동에게 아버지는 말했다. “호부호형을 허하노라!” 그러나 길동이는 떠났다. 홍길동이 원했던 것은 아버지가 허락하는 온정적 ‘호부호형’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한계 지웠던 신분예속으로부터의 해방이었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없다는 것은 기득권세력의 도리에 어긋나고 흉악한 도덕률이었다. 그것은 정신을 장악하고, 물리적으로는 구강을 강압하는 반자연적인 처사였으니 우리의 영특한 홍길동이 어찌 자유와 해방을 향한 먼 길을 떠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우리의 영특한 시민들도 참된 민주주의의 대장정에 들어섰다. 권력이 제어하기 힘든 정보의 바다에서 이 훌륭한 항해사들은 길 없는 곳에 길을 찾고, 길을 스스로 만들어가는 방법을 알아냈다. 대의민주주의가 제자리를 잡지 못하고 미친 소처럼 날뛸 때, 직접민주주의가 나서야 함을 민주주의의 역사적 유전을 통해 선험적으로 알아챘고, 그래서 촛불을 들었다.

촛불이 두려운 자들은 말한다. 촛불집회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라고. 그러나 정치는 무엇인가? 그것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듯, ‘정치’를 ‘정치’라 부르는 것이다.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자신의 운명에 관여하는 것, 그리고 이런 사태를 불러일으킨 자들에 대해 책임을 묻는 것, 그래서 이후 권력을 잡은 자들이 국민을 두려워하고 오직 국가와 국민을 위해서만 복무하게 하는 것, 이것이 ‘정치’다.

따라서 촛불을 든 것은 가장 강력한 정치행위이며, ‘정치’라는 단어의 현 실태인 것이다.
그런데 ‘정치’를 금지어로 만들어, 입에 올리는 것 자체가 ‘불순하다’고 우리의 뇌를 강압하는 것이야말로 ‘완벽하게 불순’하다. 지난 6월 서울대 총학생회가 쇠고기 문제를 제외한 정치적 의제에 대해 불참을 선언한 것은 정치 강박증의 한 단면이기도 하지만, 실은 시민들에게 심어주고자하는 기득권층의 정치거부 문화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현대적 관점에서는 누구나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게 했던 홍길동 시대가 야만으로 이해되지만, 정신과 언어를 지배당하던 당대에는 오히려 홍길동이 불온한 자였으며, 물대포가 아니라 불벼락을 내려서 폐기시켜야할 정치오염물이었다.

이것은 무엇인가? 감히 넘보지 말아야 할 곳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아버지이며, 정치이며, 밥그릇인 것이다. 촛불집회를 일러 ‘천민민주주의’라는 노기어린 일갈을 던진 주성영 한나라당 의원의 발언은 정치와 시민에 대한 그들의 입장을 명백히 드러낸다. 전 국민이 바라보는 토론장에서 그는 정치독점에 간섭하는 시민에 대한 불쾌감을 숨기지 않은 것이다.

청와대 이동관 대변인은 “아기들은 엄마 품으로 돌아가라”고 촛불을 든 시민들을 조롱했으며, 통치자 이명박 대통령은 촛불을 든 누리꾼들을 ‘정보전염병’에 감염된 단순무지한 자들로 진단 내렸다.

그들에게 정치의 영역은 나눠줄 수 없는 밥그릇이다. 홍길동에게 호부호형이 불가했듯이 시민들의 정치행동은 특권층이 허락한 온정적 한도 내에 머물러야 한다. 즉 몇 년에 한 번씩 하는 투표행위로 족함을 알아야하는 것이다. 기득권 세력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정치’의 영역을 금단의 구역으로 각인시켜왔다. 순수와 불순이라는 경계를 그려놓고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시민들의 각성과 행동에 불도장을 찍어댔다.

그러나 촛불은 ‘정치’의 얼굴에 얼룩진 오해와 저급한 공포심을 태워가고 있다. 촛불은 권력을 불안하게 만들고 있으며, 이명박 정권은 촛불집회에 대해 공권력과 사회권력을 전면적으로 가동시켜, 반대자들을 압박하고 있다. 그럴수록 시민들의 정치적 각성과 영역은 점차 깊고 넓어지고 있다. 시민들은 이제 자신의 운명에 칼날이 되어 돌아온 ‘정치’를 깊은 애정과 관심으로 재생시켜야 한다.

‘아버지’를 사랑으로 부르는 진정한 자유를 홍길동이 가져야 하듯이 우리는 ‘정치’를 오래된 친구처럼 부를 수 있는 정신적 해방을 가질 자격이 있다. 우리가 진정 원하는 것은 자유와 평등과 평화가 가득한 세상이다. 그곳에 이르는 도상에서 ‘정치’는 길이며, 친구이며, 수단이며, 밥그릇을 나누는 공정한 잣대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 인태연
<부평신문>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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