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련의 사건들. 한 남자가 한 여자와 그녀의 세 딸을 죽이고 암매장했다. 그러나 언론은 희생자를 애도하기보다 전직 야구선수라는 그의 이력과 행적에 초점을 두었다. 그녀들은 죽은 뒤에도 주목받지 못했다. 어떤 남자는 베트남에서 갓 시집온 젊은 부인을 때려 죽였다. 법정은 우리사회의 야만성을 드러낸다고 평했다. 그리고 또 한 남자는 두 어린 여자아이를 성추행하고 죽였다. 희생자가 어린이라는 이유로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지만, 사건의 본질은 여자에 대한 성폭력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한 남자는 아이들을 돌보지 않는다는 이유로 전 부인을 죽였다. 하루가 멀다 하고 들려오는 남자들의 여자들에 대한 무자비한 폭력들. 솔직히 무섭다. 밤길 거닐기도, 택시 타기도, 혼자 살기도, 그렇다고 남자 만나기도 무서운 이 상황이 대한민국에서 여자로 살아가는 현실이다.

묻지 않을 수 없다. 왜 인간사회에서는 생명을 잉태하고 보살피는 ‘살림’하는 여자들보다 전쟁을 일으키고 생명을 앗아가는 남자들이 우월한 위치에 있는가? 누군가는 그랬다. 남자들의 여자들에 대한 억압은 생명을 만들어내는 창조적인 자궁에 대한 남자들의 질투 때문이라고. 몸의 기능을 근거로 여자들의 사회적 위치를 고정시키는 남자들의 계략은 모성신화를 만들어냈다. 밥을 짓고 빨래를 하고 아이를 돌보는 귀찮을 일들을 간단하게 해결하는 방법은 바로 여자들에게 모성의 아름다움을 자꾸 설교하는 것이다.

여자들의 ‘살림’노동, ‘돌봄’노동은 사회가 유지되는 데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한 핵심노동이다. 그런데도 이러한 여자들의 노동에 대한 사회적인 가치는 거의 매겨지지 않는다. 집 안에서의 육아와 가사노동은 무임노동이며, 집 밖에서의 돌봄노동에 대한 대가는 남자들의 임금에 비해 턱 없이 적다. 

서두가 길었다. 생물학적 ‘차이’에서 비롯되는 여자들에 대한 ‘차별’을 철폐할 수 있는 방법은 바로 여자들이 정치에 나서는 것이다. 여자의 현실을 반영하는, 여자를 위한 정책을 여자 스스로 만들어 가야한다. 남자들이 여자들의 입장을 대변해 줄 수 있다는 터무니없는 믿음은 이제 버리자. 여자를 위한 정책을 펴겠다던 이명박 대통령의 공약은 절반의 유권자를 노린 입에 발린 소리에 불과했다. 정권에 오르자 바로 본색을 드러냈다.

여성가족부 폐지 방안에 대한 여성계의 강력한 항의에 어쩔 수 없이 대폭 축소해 존속시켰지만, 예산이나 인력이 거의 3분의 1수준으로 줄어들었다. 정부 부처 개편과정에서도 4개의 부처에서 ‘여성’이라는 명칭을 삭제했다. 그리고 반발하는 여자들을 향해 “내가 딸이 셋이에요”라고 잘라 말했다. 대한민국의 대다수 아버지에게 딸이 있다. 그래서 어떻다는 말인가.

총선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여성 정치인을 뽑아야 하는데, 문제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데 있다. 18대 총선의 지역구 여성 공천율을 살펴보면, 대통합민주신당과 한나라당이 나란히 7.3%라는 겉치레에 불과한 수치를 보였으며, 그나마도 전략적으로 거의 당선 가능성이 없는 지역에 전략 공천된 경우가 허다하다. 민주노동당이 지역구 전체 후보자 103명 중 여성후보자를 46명(44.6%) 공천함으로써 한국 정당 역사상 최고 여성 공천율을 기록, 여성 정치세력화의 모범이 되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물론 생물학적으로 ‘여자’라는 사실이 곧바로 여성을 위한 정책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여성의 입장 또한 여성주부, 여성노동자, 여성농민, 여성장애인, 성적 소수자 등 각각이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르다. 다양한 여자들의 목소리가 다양한 경로를 통해 정책으로 반영될 수 있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선 각양 각층에서 여성정치인이 나와야 한다. 그저 법조계, 언론계의 소위 잘 나가는 여자들을 영입하는 ‘나눠주기’식 공천은 여성정책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다.

중요한 건 삶의 과정에서의 정체성이며, 현 사회에서 여자의 삶을 어떻게 바라보는가이다. 마지막으로 이 땅의 여자들에게 당부하고 싶다. ‘당신의 한 표가 우리 여자들의 삶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 그리고 절반의 유권자인 우리 여자들에게 세상을 바꿀 힘이 있다는 사실 부디 잊지 마시기를’
▲ 황보화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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