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내고장 부평의 어제와 오늘 ⑪

편집자 주> 본지는 ‘부평의 어제와 오늘을 찾아’라는 기획 기사를 통해, 부평 지역의 과거와 발전과정을 조명하고 향후 부평지역의 발전 방향을 그려보고자 한다.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 일제하 조병창으로 사용되다 해방 후에는 미군기지로 사용된 부평미군기지 전경.

조선을 식민화한 일본은 1930년대를 넘어서면서 대륙을 향한 그들의 군국주의적 야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한다.
대륙 진출을 꿈꾸던 일본에게 조선 반도는 침략전쟁을 위한 중요한 식량공급기지가 됐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던 해, 조선총독부는 전쟁 수행에 필요한 도시의 재편을 목표로 하여 ‘인천 시가지 계획’을 발표한다. 당시 인천의 계획인구를 20만 명으로 상정하여, 상업, 공업, 주거지로 구분, 통제된 도시를 만들려 했던 이 계획의 완성년도는 1964년이었다.

식민지배가 쉽사리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싶었던 일본은 1940년에는 이에 뒤이은 조치로 ‘경인 시가지 계획’을 발표한다.
앞서 발표된‘경성 시가지 계획’과‘인천 시가지 계획’ 상의 구역 사이에 7개의 공단과 11개의 거주지를 건설하는 것을 주요 목표로 삼았던 이 계획은 김포평야와 부평평야를 절대농지로 묶어 식량공급기지로 삼으려는 의도를 함께 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일련의 계획들이 추진되는 과정에서 1939년, 부평에는 ‘조병창’이라는 일본육군의 병기창이 들어서게 된다.
현재 부평의 동아, 대림, 욱일 아파트와 산곡동의 미군부대, 현대아파트 단지 등에 광범위하게 들어선 조병창은 해방이 될 때까지 소총, 탄약, 포탄, 차량 등이 제작됐는데, 그 주변에 하청업체들이 줄지어 자리를 잡게 되면서 부평은 하나의 거대한 군수공업도시로 형성돼 간다.

일자리를 얻기 위해 이 곳으로 몰려든 사람들로 인해 ‘신촌’ 일대에는 새로운 마을이 형성되기도 했으며, 징용까지 면제받았던 공장 종사자들이 주변에 거주하기 시작하면서 조병창 주변은 일종의 판자촌을 형성, 해방 후까지 계속 이어져갔다.
침략을 위한 병기를 제작하고 있는 공장이었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노동자들이 몰려있는 까닭에 조병창은 항일운동가들의 주요한 거점이기도 했다.
 
한 예로, 1943년 3월 5일, 황장연이라는 인물이 조병창 내에서 ‘고려재건당’이라는 비밀조직을 결성해 임시정부 연락원에게 권총 3정과 탄환 50발을 전달하다 적발된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으며, ‘창천체육회’라는 비밀조직의 회장이었던 오순환은 무기조작기술을 획득할 목적으로 조병창에 위장 입사, 활동을 벌이다 일경에게 체포되기도 한다.

▲ 한국전쟁이 끝난 후의 부평미군기지 전경. 미군은 일제하 조병창 시설을 대부분 인계해 미군기지로 사용했다.

부평에서 71년째 거주하고 있는 이재석(87세·부평3동 거주)옹은 당시 부평일대에 공장이 들어서면서 이 지역이 앞으로 크게 발전하리라는 기대를 갖고 몰려든 사람들이 많았다고 회상한다. 자신도 17살에 부평에 들어와 해방 때까지 조병창에서 심부름꾼으로 근무했었다고 한다.

이재석옹의 증언에 따르면 이사올 당시인 1935년에는 부평3동의 신촌에는 10여 가구만이 거주했으며, 조병창이 들어서며 징용을 피하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이 판차촌을 형성했다는 것.
당시 이재석옹은 조병창을 다니며 급여로 10원을 받았다고 기억했다. 당시 40kg 쌀 한 가마니가 6원 5전이었다고 한다.

이 옹에 따르면 당시 조병창에는 1∼3공장이 있었는데, 3공장은 대장간으로 주로 군인들이 사용하는 총검이나 군도 등을 제작했다.
이 옹은 당시에는 몰랐지만 1944년부터 제2차 세계대전 종전까지 일제는 잠수정의 급격한 수요에 대비해 조선기계 제작소 인천공장을 감독하며 잠수정을 제작하기도 했다. 1944년 당시 조병창의 연간 생산능력은 소형선박 250척, 무전기 200조, 소총 4천정, 포탄 3만발, 차량 200대를 생산할 수 있어, 그 규모를 짐작케 하고 있다.


한편 이 옹은 현재 산곡3동 현대아파트 자리에는 조병창 일본인 관리들이 거주하는 관사 수십여채가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해방 후 주둔한 미군은 이 관사를 사용했고, 이에 관사를 돌려달라고 요구하며 주민 수십명이 미군기지 앞에서 항의 시위를 벌여 미군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고 한다.

감수 :

김현석·부평사편찬위원회 상임연구원
이상범·안남고등학교 역사교사/청소년인권복지센터’내일’ 이사장

저작권자 © 인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