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내고장 부평의 어제와 오늘 ⑨


편집자 주> 본지는 ‘부평의 어제와 오늘을 찾아’라는 기획 기사를 통해, 부평 지역의 과거와 발전과정을 조명하고 향후 부평지역의 발전 방향을 그려보고자 한다.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 1969년 1월 10일 부평정수장 전경.  


‘부천·김포 양군에 2천 4십명의 조합원을 갖고 있는 부평수리조합에서는 지난달 29일 김포군 고촌면 신곡리 수원지에서 기공식을 거행하였는데…’


위의 내용은 동아일보가 1923년 7월 4일자에 부평수리조합의 설치공사 시작을 알리는 소식을 1단짜리 기사로 내보낸 것이다.
일본은 1918년 자국에서 일어난 쌀 폭동을 겪은 후, 자국의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해 조선을 식량기지로 만들려는 의도로 ‘산미증산계획’을 세워 그 일환으로 부평평야에서도 본격적으로 실현하기 시작한 것이다.

1920년대에 들어서며 총독부는 30여년 간에 걸친 산미증산계획을 수립, 조선에서의 쌀 생산을 늘리기 위한 구체적인 사업들을 추진해 나갔다. 당시 전국 각지에 설치된 수리조합은 산미증식 계획의 성공을 위해 중점 사업으로 진행하고 있던 토지개량, 수리시설의 정비 등을 담당한 핵심 기구다.


부평수리조합은 1923년 4월 9일 설립됐다. 조합은 그 당시 부천군 소사면 심곡리 606-1에 사무실을 두었으며 출납과 기사, 서기, 평의원 등 모두 27명의 인력으로 출발했다.
부평수리조합이 담당하고 있던 구역은 부평역으로터 한강 북변까지 이어지는 부평평야 일대로, 당시 행정구역상으로는 부천군 계남면, 부내면(부평), 계양면(계양) 등과 김포군 양서면, 고촌면 등 35개 리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렇게 탄생한 부평수리조합은 제 1차 사업으로 1925년 7월부터 1927년 6월까지 재해복구사업을 벌였으며 승수로를 신설하는 등 치수사업에 나섰다. 사상 유례 없는 대홍수가 1925년 7월 4차례에 걸쳐 발생, 경기도 일원이 폐허를 방불케 할 정도로 쑥대밭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이를 계기로 부평수리조합은 재해복구사업과 함께 엄청난 비용을 들여 관계·치수사업을 벌이게 됐다.

그러나 부평수리조합은 1935년부터 해방까지 다시 시련을 겪는다. 관계·치수사업에 힘입어 일제의 산미증산계획이 성공을 거두면서 곡가가 폭락, 대부분의 수리조합들이 경영난에 빠지게 된 것이다. 또한 처음 9개로 출발한 수리조합이 1933년에는 무려 196개로 급증하면서 부실 수리조합들이 속출했다. 여기에다 1935년부터 시작된 제2차 배수개량사업, 보강사업, 경지정리사업 등은 해방과 함께 전면 중단되기에 이르렀다.

한강 물을 양수기로 끌어올려 동·서간선수로 등을 통해 관개용수로 활용하고 굴포천을 개수해 배수로로 이용하는 것이 주요 사업내용이었던 부평수리조합의 출발은 계획했던 거 만큼 순탄치만은 않았다.
수리시설 공사가 시작되고 몇 달이 지나지 않아서는 농사를 못 짓게 한다는 계양면 농민들의 민원이 제기되기도 했다. 당시 ‘동아일보’ 기자는 이 사건을 취재하면서 군청에 진정을 넣은 농민들의 불만을 이렇게 전달하고 있다.


 
▲ 1923년 10월 13일자 동아일보에 보도된 부평수리조합 관련 기사.  

‘조합에서 토지를 매매할 때 아직도 흥정을 정하기 전부터 이곳에는 수리조합터가 되면 농사를 지어도 가을에 거두지 못할테니 헛수고를 들이지 말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값도 받지 못하고 농사도 못지어 일년의 생계는 간데가 없이 된 터인데, 그러거나 말거나 당장에 무엇을 심지 않고는 먹을 수 없는 불쌍한 일부 농민은 벼를 심었더니 방금 익어서 거두게 되었다. 토지 값을 받기는커녕 결정도 나지 않고 남의 생계인 농사도 짓지 못하게 하였다 하여 그 손해배상을 청구하였더니…’

사업 초기에 이와 같은 농민들과의 마찰을 겪기도 한 부평수리조합은 1925년 예정대로 공사를 준공하게 된다. 그러나 막 준공을 끝낸 공사는 신문기사의 표현을 빌린다면 그 해 여름 전국을 강타한 폭우로 인해‘전멸’당했다. 거액이 투입된 보수공사를 통해 급수가 가능해지긴 했지만 결국 콘크리트 배합 등에서 부실공사가 자행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져 다시 개조공사를 시행하는 등 설치공사는 1929년까지 계속된다.

부평수리조합이 부실공사와 부정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조합 창설을 주도했던 황해사(黃海社)라는 토목회사와 관련이 깊다.
경성에 본점을 둔 황해사의 사장 마쯔야마(松山常次郞)는 조합 창설단계부터 계획을 수립하고 창설공사를 주도하면서 제1대 조합장을 역임하기까지 하였는데, 사실상 마쯔야마가 전권을 장악하며 부평수리조합은 황해사에 의해 주도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마쯔야마는 부정이 폭로되면서 조합장에 재임되지 못하고 밀려나야만 했다. 총독부의 명령에 따른 개수공사는 1929년 5월에 마무리가 되었지만, 부평수리조합은 이후 계속 구역을 확장하는 사업을 벌여 검단면, 양촌면, 대곶면 등 김포평야까지 아우르는 확장공사가 1952년 말까지 계속 진행되어 간다.


감수 :

김현석·부평사편찬위원회 상임연구원
이상범·안남고등학교 역사교사/청소년인권복지센터’내일’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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