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첫눈이 내렸다. 눈보라와 비바람이 뒤섞인 폭풍이 거리를 휩쓸더니 금세 해가 고개를 내밀었다가 때아닌 우박까지… 첫눈 기분이 전혀 나지 않는 첫눈이었다.
사실 포근한 함박눈이 내렸던들 내게 뭐가 달라졌을까? 아이 키우고 정신 없이 집안일 하다 보니 첫눈을 봐도 별 감흥이 없다.
그러나 딱 10년 전, 내게도 낭만적인 첫눈은 있었다. 아니, 참혹했던 첫눈이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회사의 대리님이 소개팅을 시켜주셨다. 당시 한창 유행하던 커피전문점에서 원두커피 향내와 함께 나타난 그 사람은 첫눈에 보기에도 모범생 스타일이었다. 한창 멋들어 있던 20대 초반의 내게 반듯하기만 한 그 사람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나 몇 마디 대화를 주고받다 보니 나랑 통하는 구석이 많았다. 내가 읽은 책은 그 사람도 다 읽었고 내가 본 영화는 그 사람도 다 봤다. 어떻게 이렇게 취향이 일치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첫 만남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참 맛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원래 첫 만남에 맘에 들면 같이 밥을 먹는 게 아니라던 선배의 충고를 되새기며 일찍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론 다음 약속은 받아두었다. 다음 주 토요일 오후 3시 경복궁 매표소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일주일 후, 나는 설레는 맘으로 경복궁 매표소 앞으로 나갔다. 시계를 보니 정확히 3시다. 그런데 그 남자가 나타나지 않는다. 갑자기 쌀쌀해진 날씨에 발을 동동 구르며 기다렸다. 요즘 같으면야 곧바로 휴대전화를 걸어서 어디냐고 물어봤겠지만 그때는 웬만한 사람은 호출기도 없던 시절이라 달리 연락할 방법도 없었다.
점점 회색빛이 짙어지던 하늘은 끝내 하얀 가루를 날렸다. 경복궁 앞을 지나는 연인들은 “첫눈이다”를 연발하며 팔짱을 꼭 끼고 내 앞을 지나갔다. ‘아, 첫눈이네. 그런데 이 사람은 왜 안 오는 거야?’ 첫눈 때문에 더욱 마음은 급해졌다.
1시간이 지났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실례를 무릅쓰고 그 사람 집으로 전화를 했다. 여동생으로 보이는 여자가 전화를 받았다. 그 사람을 찾았더니 약속 있다고 2시간 전에 나갔단다. 2시간 전에 나간 사람이 왜 안 오는 걸까? 더더욱 몸이 떨려왔다. 남들에게 포근하게 내리는 첫눈이 내게만 차갑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2시간이 지났다. 사고라도 난 게 아닌가 걱정이 됐다. 다시 그 사람 집에 전화했다. 여동생이 기다렸다는 듯 전화를 받는다. “오빠 지금 매표소 앞에서 2시간째 기다리고 있대요.” 무슨 소리야? 내가 지금 2시간째 기다리고 있는데. 내가 못 찾고 있나 싶어 경복궁을 아예 한 바퀴 둘러보았다. 그러나 그 사람은 없었다.
3시간째. 다시 그 사람 집에 전화를 했다. “이상하네요. 저도 매표소 앞에서 3시간째 기다리고 있는데.” “경복궁역 매표소 앞 맞아요?” “경복궁역이라뇨? 전 경복궁 매표소 앞인데요.” 아, 이제야 이해가 됐다. 그 사람은 지하철 경복궁역 매표소 앞에서, 나는 경복궁 매표소 앞에서 3시간을 기다린 것이었다.
전화를 끊고 바람처럼 달려서 경복궁역으로 갔다. 아니나 다를까, 그 사람이 발을 동동 구르며 매표소 앞에 서 있었다. 자초지종을 들은 그 사람은 코끝이 빨개진 나를 보며 미안해 어쩔 줄을 몰랐다.
그 다음은? 그날로 우리는 커플 호출기를 맞췄고, 결국 지금 같이 살고 있다. ^^

김소라(삼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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