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큰 시장이 있다. 늘 사람으로 북적여 언제 가도 명절 대목 같다. 번잡한 시장을 한 바퀴 돌고 오는 것은 웬만해선 별 일 벌어지지 않는 심심한 일상 중 꽤 격동적인 행복이다. 나는 특별히 살 것이 없어도 자주 시장에 간다. 좌판을 살피다보면 먹고 싶은 것, 필요했던 것이 속속 떠오른다. 1000원짜리 뜨끈한 순두부 한 봉지, 뿌리를 뽀얗게 다듬어 놓은 달래, 수면바지, 하다못해 호떡이라도 사온다.

지난주엔 구운 김이 눈에 띄었다. 한 봉지에 2000원, 세 봉지에 5000원이라고 쓰인 걸 보고 세 봉지를 집어 들었다. 금방 먹을 만큼 잘라서 통에 담고 나머지는 냉동실에 넣어 두었다. 마음이 든든한 한편 뭔가 미안한 감정이 올라왔다. 구운 김을 사먹을 때마다 느끼는 감정이다.

20대 중반에 독립한 뒤로 40대가 된 지금까지 한 번도 김을 구워본 적이 없다. 내 기억에 김을 굽는 일은, 반복된 단순작업에 시간이 오래 걸리고 신경도 많이 쓰이는, 생각만으로도 몸이 피곤해지는 작업이었다. 내가 목격한 김 굽는 과정은 이랬다. 엄마는 먼저 한쪽에 김을 쌓아 놓는다. 솔에 기름을 묻혀 김 양면에 칠하고 소금을 뿌려 옆으로 옮긴다.

이 작업이 끝나면 김을 한 장씩 석쇠에 올린다. 겨울엔 연탄불에, 여름엔 석유곤로에 굽는다. 석쇠를 불에 너무 가까이 가져가면 김이 타면서 푸른 연기가 위로 솟아오른다. 가끔은 김에 불이 붙기도 한다. 그렇다고 불에서 석쇠를 너무 멀찍이 올리면 김이 제대로 구워지지 않아 바삭하고 고소한 맛이 덜하다. 기름과 소금의 양, 적절한 높이와 굽는 시간에 따라 김구이의 맛이 달라진다.

김이 구워질수록 조그만 부엌엔 연기가 뿌옇게 깔리고 눈은 뻑뻑해진다. 석쇠를 잡은 손과 허리도 뻐근하다. 엄마는 내게 연기냄새 맡고 있지 말고 얼른 나가라고 성화였지만,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김을 다 구운 뒤엔 몇 장씩 도마에 올려 칼로 자를 것이다.

바로 이 순간을 위해 그 연기냄새를 다 맡은 거다. 냉장고에서 이삼일 묵어 눅눅해진 김이 아닌, 이제 막 구워 바삭하고 짭조름하고 불내 가득한, 구운 김 최고의 맛은 지금을 놓치면 사라지고 만다. 짜디짠 김을 입에 넣은 그 순간엔 마냥 행복했다. 엄마는 김을 다 구운 뒤엔 김 가루가 흩어진 부뚜막 주변과 부엌 바닥을 쓸었다. 김 한 톳을 모두 구웠으니 기름칠 백 번, 소금뿌리기 백 번, 굽기 백 번, 그리고 뒷정리까지. 그제야 지루한 김구이 과정이 끝난다.

막상 저녁 밥상에 그 김이 올라오면 왠지 젓가락이 가지 않았다. 엄마가 얼마나 고생해서 구운 김인지…. 다른 식구들이 무심코 김에 밥을 싸먹을 때마다 엄마가 노력한 결과물이 사라지는 것이 미안했다. 나는 김을 아껴먹었다.

그 후로 삼십여 년이 훌쩍 지났다. 시장에서 사온 김은 분명 기계가 구웠을 테다. 더 이상 미안해할 필요 없건만, 그럴수록 엄마의 노고가 흔적도 기록도 없이 사라져버리는 것 같아 아쉬움이 컸다. 김에 밥을 싸먹으며 엄마에게 전화했다.

“엄마는 그 많은 집안일을 하면서 김까지 구웠어?”
“뭐든 반찬이 있어야하니까. 너희가 좋아하기도 했고”
“자주 먹은 것 같진 않은데.”
“김도 그리 싸지 않았지만 네 말대로 김 굽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잖아”
“엄마 어렸을 때도 김 구워먹었어?”
“그럼, 외할머니가 해산물을 좋아하셨어. 자주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김을 꽤 먹었지”

엄마는 열 살이 되기 전부터 외할머니와 집안 살림을 함께 했다. 김을 구울 땐 마른 짚을 묶어 사용했는데 간혹 김이 찢어지기도 하고 이래저래 불편했던 모양이다. 어느 날 외할머니가 처음 보는 것으로 기름을 바르고 있었다고 한다.

“저게 뭘까, 하고 한참을 봤는데 잘 모르겠더라고. 얼마 후에 알았지, 그게 북어꼬리였다는 걸. 북어꼬리로 하니까 기름이 골고루 얇게 잘 발라지고 부드럽고 아주 좋은 거야. 어떻게 이걸 사용할 줄 알았을까, 참 기가 막힌다고 생각했지”

# 쉽게 김 굽는 ‘꿀팁’은 북어꼬리

 

1967년 1월 28일자 <동아일보> ‘살림의 아이디어’란에 전북 옥구군에 사는 김수련씨의 글이 실렸다.

“짚의 속대를 15~20센티미터쯤 잘라 손가락 두께 만큼 잘 묶어서 발라보았더니 골고루 잘 발라져서 한결 맛이 좋았고 김이 찢어지는 일이 없어서 모양이 좋아졌다. 한 번 쓰고 버리지 말고 깨끗하게 잘 간수하여 여러 번 쓸 수 있도록 하면 더욱 좋다”

3년이 지난 1970년 1월 10일자 <매일경제>에 김 솔이 신상품으로 처음 등장했다.

“김 솔은 가벼운 플라스틱제 둥근 통의 첨단부분에 솔을 달고 그 둥근 통에 김을 쟁이는 참기름 또는 콩기름을 넣게 되어 있는데 사용할 때는 뚜껑을 열고 거꾸로 들면 통과 솔 사이에 뚫린 구멍을 통해 기름이 새어나와 솔을 적시게 되며 이것으로 쟁이면 된다”

둥근 통 뚜껑에 솔을 달고, 그 솔이 통 바깥인 위쪽으로 튀어나오게 만든 듯하다. 거꾸로 들면 통 속의 기름이 솔로 흘러나온다. 이어진 글엔 놀라운 내용이 담겨 있다.

“종래 우리가 가정에서 김을 쟁일 때 손으로 기름칠을 하거나 북어꼬리를 잘라 사용하는 등 비위생적인 면을 완전히 커버하고 있다”

북어꼬리로 김을 굽는 방법은 당시 살림하는 이들 사이에선 ‘꿀팁’이었던 모양이다. 엄마는 한국전쟁이 일어난 줄도 몰랐을 만큼 아주 외진 곳에 살았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에도 생활의 지혜는 입에서 입으로 널리널리 퍼졌나보다.

이어서 1970년 1월 15일 <동아일보>에도 “새로 나온 기름바르기는 매우 편리한데 (중략) 얇은 김은 손을 놀릴 때 물 칠하듯 하면 찢어지니 꾹꾹 찍는 요령으로 바른다”는 내용이 실렸다. 김이 찢어진다는 걸 봐서, 나는 이 김 솔이 굉장히 뻣뻣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초등학교 때 엄마가 사용하던 김 솔도 억세고 질이 썩 좋지 않았다. 몇 번 쓰지 않았는데도 솔이 한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해 이내 솔의 탄력이 거의 사라졌다. 요즘 바깥에서 쓰는 플라스틱 빗자루를 오래 사용하면 솔 부분이 옆으로 휘어 잘 쓸리지 않는 것처럼, 김 솔도 딱 그랬다.

# 며느리 음식솜씨 판가름하는 방법?

가뜩이나 손이 많이 가는 까다로운 작업에 도구까지 시원찮으니 김 한 번 굽는다는 게 보통 각오로 덤빌 수 있는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1975년 11월 21일자 <동아일보>에 할 말을 잃게 만드는 기사가 실렸다.

“서울지방에서는 옛날에 새 며느리를 보고 제일 먼저 김을 재우게 하여 음식솜씨를 판가름해왔는데 확실히 일리가 있는 것이었다. 기름을 알맞게 골고루 바르는데 기름이 지나치게 많으면 오그라들고 모자라면 쉬 타게 된다”

이제 막 결혼한 며느리가 낯선 집에서 살림을 시작하느라 얼마나 적응하기 힘들었을까. 잘 모르고 서툴면 찬찬히 가르쳐주면 될 것을, 시험하고 판단까지 할 일인가 싶다. 요즘 논란이 되고 있는 간호사계의 ‘태움 문화’ 속에 시어머니-며느리의 그림자가 보인다. 태움 문화는 선배 간호사가 신임 간호사를 괴롭히는 방식이 재가 될 때까지 태우는 것 같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간호학과 학생들 사이에서도 이미 잘 알려져 있는 보편적 문화라고 한다.

간호사계에 ‘태움’이 있다면 군대에는 ‘갈굼’이, 일반 가정에는 ‘시집살이’가 있다. 이는 모두 위계질서와 역할만 중시하고 그 안의 인간을 보지 못하게 하는 가부장 문화의 또 다른 얼굴이다. 어느 한 집단의 문제가 아닌 다 함께 풀어야할 숙제다.

# 구이 김 시장에 너도나도 뛰어들어

기름 바르는 솔이 나온 지 10여년 만에 ‘자동 김구이’ 기계가 개발돼 특허를 얻었다.

“‘자동 김구이’는 김의 품질에 따라 참기름 배출량과 소금 배출량을 조절해주면 김이 한 장씩 참기름 배출 롤러와 소금 배출 롤러를 통과, 적당량의 소금과 참기름이 발라지게 된다. 이렇게 참기름과 소금이 발라진 김은 다시 전열판을 통과, 타지 않고 알맞게 구워지게 된다”(매일경제 1982.8.13.)

‘자동 김구이’라 불린 김 굽는 기계는 일반 가정에서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은 아니었다. 이 무렵 구워 나온 조미 김이 서서히 시장에 나오고 있었다.

“‘구이김’ ‘맛김’ 등으로 불리는 가공 김이 우리나라에 첫 선을 보인 것은 지난 1980년 6월경, 태조실업, 삼해김 등이 일본의 것을 모방, 우리나라 사람들의 기호에 맞게 만들어져 선보였는데 소비자들로부터 큰 인기를 끌면서 새로운 식품으로 자리 잡았다”(매일경제 1988.8.17.)

일본에서 기계를 수입해 사용해오던 중, 국내에서도 김 굽는 기계가 만들어진 것이다. 사온 반찬을 상에 올린다는 것이 정서적으로 편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던 때인 만큼 중소기업들이 판매처를 찾기란 그리 쉽지 않았을 터. 업체들은 구매력 있는 고객이 많이 찾는 백화점을 공략했다. 손이 많이 가는 김을 편하게 사먹을 수 있다니,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이들이 이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조미김이 크게 환영받으면서 여러 중소업체들이 생산에 참여해 1980년대 가공 김 시장 규모는 해마다 40퍼센트 이상 확대됐다.

하지만 얼마 안 가 많은 중소업체들이 도산했다. 1986년 동원사업, 오뚜기식품, 동방유량이, 1987년엔 미원과 사조산업 등 대기업이 이 시장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대기업들은 시설과 장비, 인력을 갖춰놓은 중소기업을 차례차례 인수했다. 삼해김, 진양구이김, 유신갯마을김, 안성돌고래김 등 다양한 중소기업체들이 각축을 벌이던 조미김 시장이 점점 대기업 쪽으로 기울더니 1987년엔 동방유량의 해표김(25.5%)과 동원양반김(17.6%)이 시장점유율에서 나란히 1, 2위를 차지했다.(매일경제 1987.9.12.)

이 시기 대기업들은 조미김 만이 아니라 김치, 어묵, 오징어 가공 시장에도 손을 뻗쳤다. 이 업종들은 시장 규모가 작아 대기업이 그동안 외면해온 분야였다. 그런데 아파트가 늘어나는 등 생활모습이 크게 변하면서 국내 수요와 일본 수출이 늘자 대기업들이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구이김 생산업체 40여개는 대기업의 신규 참여를 막아달라고 요청했지만, 정부는 구이김이 중소기업 고유 업종으로 지정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모두 허용하고 말았다. 결국 대기업은 1988년 가공김 시장의 80%를 차지했다.

# 기계로 대체된 노동, 까맣게 잊히는 건 아쉬워

요즘엔 김 양식이 늘어나 김 값이 많이 저렴해졌다. 조미김을 생산하는 중소업체들도 많아졌다. 덕분에 구이 김을 예전보다 훨씬 흔하게 먹는다. 편하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평범해졌다. 구이 김을 앞에 놓고 구태여 번거로운 노동을 떠올리는 이들은 이제 구세대에서나 겨우 찾아볼 수 있겠다.

노동이 줄어들고 사라지는 것은 반길 일이다. 기쁘게 환영한다. 그러나 단 한 번도 제대로 보상이나 인정을 받지 못한 노동이 기계로 대체돼, 마치 세상에 없던 일처럼 까맣게 잊히는 것은 슬프다. 적어도 내 피와 살을 만들어준, 자세히 보지 않아 없는 줄 알았던 누군가의 소중한 피와 땀을 나는 잊고 싶지 않다. 오늘도 나는 구이 김을 마음속으로 아껴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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