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배 노동자교육기관 회원

▲ 김형배 노동자교육기관 회원

경찰의 음주단속을 너무 싫어한다. 내가 가는 목적이 있는 길을 공권력이 멈추게 하는 단 그 몇 초가 싫다. 음주운전을 해서는 안 되지만 길을 가로막고 모든 차를 세우며 단속하는 것은, 국가로부터 무엇인가 침해당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학생 때 마음잡고 ‘이제 공부해야겠다’라고 마음을 먹자마자 바로 부모님이 ‘너는 왜 요새 공부 안 하니? 공부 좀 하라’고 하시면, 기분이 팍 상해 부모님의 잔소리를 핑계로 가뜩이나 하기 싫은 공부가 더 하기 싫어진 기억이 있다. 이 기억과 내가 가는 길을 공권력이 가로막는 것 사이에 공통점은 그다지 없지만, 강제로 하기 싫은 마음은 비슷하다. 강제로 무엇을 한다는 것은 스트레스를 굉장히 많이 받는 일이다.

‘강제’란 뜻이 들어간 단어가 있다. ‘국가가 권력을 앞세워 국민을 강제적으로 일정한 업무에 종사시킨다’는 의미의 ‘징용’이다. 징병, 징발. 왠지 ‘징’이 들어가는 말은 내키지 않는다. 특히 강제징용노동자는 고통을 넘어 죽임과 연결되는 단어다. 노동자가 하는 노동 중에 하기 좋은 노동이 있을까?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선택했을 때 일을 즐기면서 하는 게 가능하다고 하는데, 과연 몇 퍼센트의 사람이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택했을지 의문이다.

산업혁명 초기 노동자들의 요구는 ‘기간의 정함이 있는 노동’이었다. 왜냐하면 ‘계약기간에 정함이 없다’라는 이유로 사용자들이 노동자들의 퇴사를 막고 어릴 때부터 늙어 죽을 때까지 부려먹었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스스로 일을 그만 둘 권리를 쟁취했다.

그러나 지금은 ‘사실상 기간의 정함이 없는 노동’을 원한다. 바로 정규직이다. ‘정년’도 기간의 정함을 뜻하지만, 몇 개월 몇 년이 아니라 정년까지 일할 수 있는 정규직을 원하는 세상이다.

못 살도록 일을 시킨 세상에서 못 살도록 일을 안 시키는 세상으로 변했다. 변하지 않은 것은, 기간의 정함이 있으나 없으나 세대를 넘어 굶어 죽지 않을 만큼 임금을 받으며 가난하게 살아가는 노동자 신세다. 세상이 이렇다 보니 ‘좋은 노동’을 찾기 힘들다. 여행도 다니고 취미도 즐기면서 행복하게 살기 위한 노동이 좋은 노동이다. 좋은 세상이 곧 좋은 노동이고, 좋은 노동이 곧 좋은 세상이다.

그런데 징용과 노동이 한 몸이 된 강제징용노동은 오죽했을까? 나라 잃은 백성들은 기댈 언덕도 없이 탄광에서 공장에서 밀림에서 죽어갔다. 군함도 강제징용노동자들은 1초에 8미터씩 내려갔던 승강기를 타고 석탄을 캐다 죽고, 방파제를 넘어서 4~5킬로미터를 헤엄쳐 도망가다 죽고, 천운으로 탈출해 나가사키에서 숨어살다가 원폭투하로 죽었다. 일본의 공식 사죄와 배상으로 그 영혼들을 달랠 수 있을까? 그러나 일본은 안하무인이다.

지옥의 윤회인 강제징용노동에서 기본소득이라는 살아갈만한 세상으로 점프하고 싶다. 살기위해 억지로 일하는 세상을 끝내야한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나. 노동조합을 만들어 정당한 권리를 요구하고, 노동을 귀하게 여기는 정당에 가입하고, 적폐청산을 위한 정치개혁을 응원해야하지 않나. 그 또한 좋은 노동처럼 즐겁게 할 수 있으면 금상첨화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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