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일 인하대 명예교수

▲ 박영일 인하대 명예교수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발표한 ‘아이엠에프(IMF) 외환위기 발생 20년 대국민 의식조사 결과’를 보면, 외환위기가 자신의 삶에 부정적 영향을 끼쳤다는 응답이 59.7%로 절반을 넘었다. 당시 대학생, 자영업자, 사무ㆍ관리ㆍ전문직 종사자들에서 특히 높았다. KDI가 외환위기 1년만인 1998년 12월에 실시한 조사에서 국민의 60.8%가 ‘긍정적 효과가 더 클 것’이라고 답했던 것과 대조된다.

당시는 기업 2만여 개가 문을 닫고, 160만명이 일자리를 잃는 등 피눈물 나는 고통을 견뎌내면서도 마음은 위축되지 않았다. 왜였을까. 개발독재체제에서 누적된 정경유착과 부정부패, 재벌체제를 근본적으로 개혁해 민주적이고 공정한 사회ㆍ경제구조를 확립할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국민적 열망과 IMF 등 국제사회로부터 고강도 압력이 구조개혁에 대한 희망과 기대를 낳았다.

그렇기에 전 국민이 단합해 불과 4년도 되지 않아 구제금융 전액을 상환하고 IMF체제에서 졸업할 수 있었다. 그런데 20년이 지난 후 현실은 국민의 기대를 완전히 저버렸다.

예상됐던 구조개혁은 기득권 세력의 반발에 밀려 시늉만 내고 말았다. 오히려 재벌의 경제력 집중과 족벌체제는 더욱 강화됐고, 정경유착과 권력형 부정부패도 더욱 노골화됐다. 사회ㆍ경제의 구조적 불공정과 부패는 더욱 악화돼 금수저ㆍ흙수저의 세습자본주의로 치달은 것이다.

한편, 노동시장은 유연화란 명분으로 인력조정이 일상화됐다. 해고는 용이해졌고 평생직장이란 개념도 사라졌다. 직장에서 쫓겨난 노동자들이 먹고살기 위해 창업에 나서면서 자영업 과잉과 가계부채만 커졌다. 위의 의식조사 결과에서 상위 3개 부정적 영향이 양극화 심화, 실업 심화, 비정규직 확대 등 노동빈곤과 고용불안이다. 지금 1800만 비정규직, 미조직노동자, 자영업자의 삶은 고단하고 불안하고 억울하다. 땀 흘려 생산한 소득은 자본에만 귀속되고, 노동대중의 몫은 줄기만 했다.

노동자 조직률은 계속 떨어졌고 자본과 협상에선 밀리기만 한다. 노동의 약한 교섭력을 메워줘야 할 정부는 자본과 결탁해 더욱 악독하게 노동을 배제하고 탄압했다. 성장잠재력도 날이 갈수록 떨어져왔다. 저성장이 고착화되고 성장해도 일자리가 생기지 않았다. 청년들의 눈높이를 충족할만한 일자리가 턱 없이 부족해 체감실업률은 무려 22%에 달한다. 결혼과 출산을 기피해 사회재생산마저 위태로울 지경이다.

이런 상황에서 촛불이 타올랐다. 단순히 무능하고 부패한 정치권력의 퇴진만을 요구한 것이 아니었다. 사회에 만연한 사회ㆍ경제적 불평등과 불공정을 바로잡으라는 절규였다. 노동의 희생으로 나라경제와 기업이 살아났다면 이제 노동자에게 안정된 일터와 정당한 보수를 제공하고 노동 환경과 조건을 개선하는 등 보상해줘야 할 것이 아닌가. 바로 지금이 그 때다.

정당한 대우를 받을 수 없게 노동자들을 옥죄고 있는 모든 정책과 관행을 바로잡아야 한다. 노동자들이 단결해 노동조건을 향상시키고, 사용자의 불법과 편법, 비리를 현장에서 견제하고 감시할 수 있게 법과 제도를 정비해야한다. 안전하고 좋은 일자리를 창출하고 인간다운 최소한의 생활이 보장되게 국가재정이 뒷받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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