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심혜진.
밥을 먹다 말고 남편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방금 남편의 입에서 나온 말이 믿기지 않아 다시 한 번 물었다.

“그러니까, 백미랑 현미랑 아예 다른 종자라는 말이지?” “당연하지. 네가 농사를 안 지어봐서 모르는 거야”

시골에서 자란 남편은 어렸을 때 농번기엔 일을 돕느라 집에서 숙제도 못했단다. 당연히 벼가 자라는 것도 봤을 것이다.

나도 시골에서 자랐지만 집에서 농사를 짓진 않았다. 농사일도 해본 적 없다. 그래도 백미와 현미를 모르진 않는다. 스물다섯 살부터 마흔이 넘은 지금까지 현미밥을 손수 지어 먹고 살았으니까.

현미는 벼에서 왕겨라고 부르는 겉껍질만 슬쩍 벗겨낸 것이다. 속껍질인 쌀겨와 쌀눈이 붙어 있어 밥을 했을 때 깔깔한 느낌이 난다. 쌀겨를 거의 다 제거한 것이 백미다. 쌀겨에는 섬유질과 단백질, 지방, 무기질 등 좋은 영양성분이 가득하다. 변비도 없어지고 피부도 좋아지고 성인병도 예방한다기에 나는 현미밥을 먹기 시작했다.

문제는 결혼을 한 후에 생겼다. 생전 처음 현미밥을 맛 본 남편은 얼굴을 찡그렸다. “너무 맛이 없어. 못 먹겠어” 헉, 나는 맛만 좋구만. 현미와 백미가 같은 벼에서 나온 건가, 아닌가 하는 논쟁은 이런 와중에 나온 것이다. 남편은 그 둘은 뿌리부터 아예 다른 식물이라고 했다. 어이가 없어 바로 핸드폰에서 검색해 남편에게 들이밀었다. 다음부터 남편은 밥솥 한 가운데 선을 긋듯 백미와 불린 현미를 최대한 섞이지 않게 나눠 넣었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나 얼마 전부터 남편이 현미밥을 먹기 시작했다. 여전히 맛은 없지만 건강을 생각해 먹는단다. 이제 밥을 번거롭게 나눠서 할 필요가 없다. 때마침 어머님이 햅쌀이 나왔다며 전화하셨다. 백미 대신 현미로 보내달라는 부탁을 처음으로 드렸다. 과묵한 어머님은 “응, 알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며칠 뒤 무거운 자루 하나가 집에 도착했다. 열어보니, 찰흑미와 녹미(껍질이 녹색인 쌀)가 가득 들어있었다.

남편이 씩 웃으며 말했다. “나랑 똑같아” “뭐가?” “엄마도 현미가 뭔지 모른다니까” 아니 벼농사만 몇 십 년인데 어떻게 그럴 수가. “농사짓는 사람들한테 쌀은 무조건 백미라니까”

남편 말이 맞았다. 어머님은 찰흑미와 녹미를 두고 “그게 현미”라고 말씀하셨다. 물론 현미처럼 속껍질을 벗기지 않은 건 맞지만, 너무 단호하고 분명해서 차마 다른 말은 하지 못하고 그냥 “잘 먹겠습니다”라고 했다.

전화를 끊고 생각했다. 평생 농사지으며 땅에서 난 것을 먹고 살아온 분에게 유기농이니 현미니 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런 건 오염물질 가득한 도시에서 첨가물 잔뜩 든 음식을 먹고 살며 온갖 면역질환에 시달려온 나 같은 사람한테나 유용한 거였다. 어머님이 현미를 모르시는 건 무식해서가 아니라 적어도 어머님의 삶 테두리 안에서는 그런 걸 굳이 알 필요가 없기 때문이 아닐까.

아무리 그래도 매번 흑미와 녹미를 20킬로그램이나 받을 순 없다. 두 식구가 먹기엔 너무 많은 양이다. 다음 번 시골에 내려가면 현미에 대해 다시 한 번 말씀을 드려볼까 싶다. 언젠가 시골에서 올라올 ‘진짜 현미’를 기다리며 보내주신 쌀 열심히, 감사히 먹어야겠다.

※이 글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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