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차로 시골길을 지날 때였다. 어디선가 쿰쿰한 냄새가 났다. 남편이 “근처에 양계장 있나보다”라고 중얼거렸다. 남편이 고등학생일 때 집에서 양계장을 했단다. 사료에서, 아니 정확히 말하면 사료에 섞는 항생제에서 독특한 향이 나는데 이 쿰쿰한 냄새가 바로 그 냄새라는 것이다. 나는 남편에게 양계장 일에 대해 자세히 물었다. 그가 해준 이야기는 다음과 같았다. 양계장 일은 이른 새벽 닭 배설물을 치우는 것으로 시작한다. 바닥에 떨어진 배설물을 긁어 바깥에 펼쳐놓는다.

여러 번 뒤집어 가며 속까지 바싹 말린 닭똥은 따로 창고에 쌓아두었다가 비료로 판다. 똥을 치운 뒤엔 닭장을 돌며 3000마리가 넘는 닭에게 하루 세 번 모이를 준다. 여름철엔 수시로 물통에 물을 채워놓아야 한다. 닭장 하나 당 닭 두 마리가 산다. 하지만 두 마리가 살기엔 닭장 크기는 턱없이 작았다. 그래서 힘 센 닭이 약한 닭을 깔고 앉는 경우가 많았고, 아래에 깔린 닭 등에는 털이 자라지 않았다.

모든 닭은 부리가 뭉툭하고 짧았다. 서로 쪼고 할퀴어 상처 내는 것을 막기 위해 병아리일 때 부리와 발톱을 전기인두로 지져놓았기 때문이다. 닭이 늙어 더 이상 알을 낳지 못하면 내다 팔았다. 남편은 늙은 닭이 헐값에 팔려가는 모습을 볼 때마다 불쌍한 생각이 들었단다.

 
뉴스나 책을 통해 축산농가에서 닭을 어떻게 기르는지 대충 알고 있었다. 치킨을 주문하기 전엔 늘 갈등했다. 맛있다고 습관적으로 치킨을 먹는 건 아닌지, 닭에게 죄를 짓는 게 아닌지. 치킨 생각을 접을 때가 많지만 가끔은 식욕이 죄책감을 이긴다. 그렇다고 아주 이기는 건 아니다. 먹으면서도 닭에게 미안하다. 나는 위선자인가, 고민도 한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알면서 먹게 되고, 먹으면서 죄스럽다.

닭의 부리를 자르지 않고 좀 더 넓은 곳에서 키우면 죄책감이 사라질까. 농약을 사용하지 않은 곡식을 먹이고, 사료에 항생제를 섞지 않으면 괜찮을까. 아예 채식을 하는 편이 나을까.

이번 ‘살충제 계란’ 사태를 지켜보면서 오래전 읽은 책을 다시 펴들었다. 마이클 폴란의 ‘잡식동물의 딜레마’에는 미국의 조엘이라는 농부가 만든 ‘폴리페이스’ 농장이 나온다. 조엘은 소, 닭, 돼지, 칠면조 등 가축을 방목해 기르는데 그의 농장에선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 있다. 바로 똥을 치우는 일이다.

그는 구역을 나눠 풀을 기른다. 충분히 자란 풀밭에 소를 풀어 놓으면 소는 풀의 억세지 않은 윗부분을 뜯어 먹는다. 다음날, 조엘은 어제 그 풀밭에는 절대로 소를 풀어놓지 않는다. 풀이 완전히 회복되려면 열흘의 시간이 필요하다. 풀을 바짝 뜯어 먹게 두면 초원이 황무지로 변하는 건 순식간이다. 대신 3일 후 그 풀밭에 닭을 풀어 놓는다. 닭은 소들이 남기고 간 배설물을 파헤쳐 파리 유충과 기생충을 잡아먹는다. 3일은 파리 유충이 포동포동하게 살이 쪄 딱 먹기 좋게 자라는 시간이다.

닭은 단단한 소똥을 부수어 땅 속으로 스며들게 하고, 풀에게 필요한 질소가 가득 담긴 배설물을 남긴다. 열흘 후 소들은 파리도, 기생충도 없는 쾌적한 환경에서 자란 풀을 다시 뜯게 된다. 소에게 구충제를 뿌리거나 독성 물질로 기생충을 없앨 필요도 없다. 이 농장에선 ‘오염물질’을 찾을 수 없다. 풀-소-닭의 연결이 다시 풀로 이어지면서 동그란 선순환 고리가 만들어진다.

“모든 게 다 연결돼있다” 이것이 조엘의 생각이다. 닭의 부리를 지지는 것을 그만두고 닭에게 유기농 사료를 먹이고 닭을 볏짚이 깔린 흙에서 방목해 기르더라도, 그래서 계란이 아주 좋은 영양성분으로만 가득 차게 되더라도, 그것이 선순환 고리를 이루는 과정의 부산물이 아니라면 어딘가에서 반드시 문제가 발생한다. 계란 이야기는 양계장이 아닌, 풀밭에서 다시 시작해야한다.

※이 글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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