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란세력의 진압과 병력 증원, 참담한 결과를 늦출 뿐


<부평신문>은 국제문제에 관한 세계적 진보권위지로 자리잡은 프랑스의 국제문제 전문 월간지 <르 몽드 디플로마티크>의 한국판 기사 가운데 일부를 선택해 독자들에게 제공한다. <르 몽드 디플로마티크>는 세계의 신자유주의 문제뿐 아니라, 노동·외교통상·문화예술·기업과 금융·과학과 환경·정보통신과 미디어 등 깊이 있는 기사로 국제문제에 대해 균형적인 시각을 제공하고 있으며, 현재 전 세계 56개국에서 150만부가 발행되고 있다.



2008년 11월로 예정된 선거를 18개월이나 앞두고, 차기 대통령 선거운동이 미국에서 이미 시작됐다. 조지 W. 부시의 자리를 노리는 주요 후보자들은 이라크 전쟁의 시들해진 인기를 몸으로 절감하는 듯하다. 공화당의 후보자들까지 이라크라는 진창에서 서둘러 발을 빼면서 다른 주제들을 거론하면서 국민에게 선택받을 기회를 엿보는 실정이다. 그러나 백악관의 대통령은 두 귀를 막아버린 듯이 또 다른 모험을 시도할 작정인 듯하다.


보고서의 다툼이었을까? 2007년 1월 10일, 미국 부시 대통령은 네오콘의 싱크탱크인 미국기업연구소의 분석에 고무돼 이라크에 병력을 증강하겠다는 정책을 발표했다. 지난 12월 이라크에서 철수를 권고한 베이커 보고서를 일축하고 부시는 2만 1500명의 병력을 이라크에 추가로 파병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의회의 반응이 호의적이지 않다. 상원에서 다수당인 민주당의 해리 레이드 원내대표는 2월 18일 CNN과 가진 인터뷰에서, 그런 군사적 모험은 ‘실패와 증병’을 반복했던 베트남의 실수를 훨씬 능가하는 중대한 실수가 될 것이라 전망했다.

백악관에 내린 준엄한 채찍이었던 11월 7일의 선거로 민주당은 상·하 양원에서 다수를 차지했다. 조지 W. 부시는 ‘완패’를 인정했고 이라크에서 ‘새로운 접근법’을 채택하겠다고 약속했다. 도널드 럼스펠드가 국방장관에서 물러나고 아버지 부시의 측근이던 로버트 게이츠가 그 자리를 메웠다. 특히 게이츠는 제임스 베이커 전 국무장관과 하원 외교문제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전 민주당 하원의원 리 헤일턴이 이끄는 ‘이라크연구회(공화당원 5, 민주당원 5)’의 회원이기도 하다. 그들의 보고서는 미국 대통령에게 명예로운 탈출구를 열어주겠다고 약속했다.

‘따라야 할 길 : 새로운 접근’이란 제목이 붙여진 그들의 보고서는 크게 두 가지 권고로 이루어졌다. ‘책임 있는’ 과도기를 조성하는 데 초점이 맞춰진 첫 번째 권고는 전투부대를 2008년 4월 이전에 이라크에서 철수하라는 것이었으며, 이라크에 미군기지를 상주시키려는 계획에도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두 번째는 ‘새로운 공격적인 세계 외교’에 관련된 권고였다. 갈등을 군사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원칙에서, 그들은 네오콘의 입장과 완전히 배치되는 정책을 권고했다. “중동에 민주주의를 확산시키는 것은 더 이상 화급한 과제가 아니다. 지금까지 미국은 시리아와 이란과 대화를 하라는 촉구를 받아왔고, ‘영토보다 평화가 우선’이라는 원칙 아래에서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 간의 협상에 새로운 방식으로 단호히 개입하라는 요구도 받았다.”

‘이라크연구회’의 보고서는 새로이 선출된 민주당 의원 다수에게, 또한 상당수의 공화당 의원에게도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졌다. 부시 대통령도 그 보고서에 상당한 관심이 있다고 공개석상에서 밝혔지만 다른 의견들을 경청한 후에 새로운 전략을 발표하겠다고 말했다.
백악관이 결정한 군사적 밀어붙이기 전략을 설명하려면 부시 대통령의 정치관과 종교관, 심지어 심리상태의 근원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 판이다.

수 년 전, ‘이라크와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아버지에게 조언을 받았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현 대통령은 “천만에. 내가 힘을 얻기 위해서 도움을 청해야 할 사람은 아버지가 아니다. 그런 때면 나는 언제나 하느님에게 도움을 청한다”고 대답했다. 모든 왕조에서 확인되듯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애매한 면이 없지는 않다. 특히 외교정책에서 아들은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려고 급격한 단절을 꾀하는 것이 관례였다.

아버지 부시는 국제정책에 푹 빠져 지냈다. 실리를 챙기는 현실주의자가 되려고 한 그의 주된 군사적 업적은 1991년에 쿠웨이트에서 이라크군을 축출한 것이었다. 당시 국무장관이던 베이커는 아랍 국가까지 포함해서 34개 국가로 연합군을 규합시켰고, 정식으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승인을 얻었으며, 동맹국들에게 전쟁비용을 분담시켰다.

아버지와 달리, 부시는 대통령이 될 때까지 외교에 문외한이었다. 하지만 아버지에게 훌륭한 고문단을 물려받았고, 대학 교수이던 콘돌리자 라이스가 가정교사 노릇을 맡았다. 그밖에 다른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받았다. 예컨대 1998년 텍사스 주지사가 되었을 때, 당시까지 해외여행을 거의 하지 않았던 미래의 대통령은 이스라엘을 방문했다. 당시 외무장관이던 아리엘 샤론은 그에게 처음으로 군사전략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었고, ‘무력에 의한 평화’ 원칙이 ‘영토보다 평화가 우선’인 원칙보다 더 나은 이유를 설명해주었다. 게다가 피터 갤브레이스 대사의 폭로에 따르면, 2003년 1월, 즉 이라크 침략이 있기 2개월 전까지 미국 대통령이 시아파와 수니파의 대립조차 몰랐다.

대통령이 되고 9개월이 지나지 않아, 선거운동을 하면서 공약한 외교정책은 헌신짝처럼 버려졌다. 2001년 9월 14일, 워싱턴의 한 교회에서 사흘 전의 9.11테러로 목숨을 잃은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는 예배가 있은 후 부시 대통령은 “세상에서 악의 뿌리를 뽑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수많은 증인들에 따르면, 부시 대통령은 자신의 길을 찾은 듯했고 백악관에 그가 있는 이유를 신의 섭리로 생각하는 듯했다.

부시의 전략 참모, 칼 로브로 추정되는 부시의 한 측근이 론 서스카인드에게 밝혔듯이, “게임의 규칙이 바뀌었다. 우리는 이제 제국이다. 우리가 행동할 때마다 우리 식의 세계를 만들어간다.”


주도권을 되찾기 위해서 이란을 표적으로?

9.11사태가 지나치게 타협적이던 과거 정책의 실패 사례로 분석되면서 ‘예방’이란 원칙 아래에 일방적인 정책이 시작됐다.

이라크 침략은 무슬림의 아랍 세계를 근본적으로 개혁하고 중동 지도를 재편하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판단됐다.
그후, 이런 전제 아래에서 정책 연구소들과 영향력 있는 평론가들은 처음엔 기적적인 해결책을 갈구하는 대중의 열망에 부응해서 불명확한 추론까지 해대면서 부시의 정책을 지원해주었다. 미국이 해방군으로 환영받을 것이고, 세속적인 자유민주주의가 이라크에서 시작돼 이스라엘과 평화조약을 체결할 것이며, 이라크가 무슬림 세계의 실험실이나 모델로 거듭날 것이라고. 또한 도미노 효과로 인해서 정권교체가 아랍지역에서 시작되고, 자유선거를 통해 사방에서 온건파가 승리를 거둘 것이며, 중동의 갈등이 해결될 것이란 전망까지 있었다. 

그런데 오늘날까지 미국 대통령은  이런 기적이 가능하리라 고집스레 믿고 있으며, 그 꿈의 실현이 뒤로 미뤄진 것일 뿐이라 생각한다.
네오콘들이 백악관 주인의 비위를 맞췄다. 그들은 부시를 처칠과 같은 인물로 승화시켰다. 신의 소명까지는 아니더라도 역사적 소명을 띤 영웅으로! 그들이 제의한 병력 증강은 재앙적 결과를 낳을 것이 뻔하지만, 철군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사방에서 빗발치고 “로라와 버니(영부인과 애견)만이 그의 뜻을 지지하더라도” 어떤 수를 써서라도 현재의 정책을 유지하겠다고 천명한 대통령의 고집이기도 하다. 물론 어조는 상당히 타협적으로 변했다. 부시는 새로운 전략에 기회를 달라고 당부하며, 병력의 증강으로 바그다드를 안정시키고 이라크 국민을 화합시키는 데 필요한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이라 역설했다.

병력 증강은 “결정권자는 나다!”라고 끊임없이 반복해온 대통령에게 주도권을 되찾는 계기가 되었다. 민주당이 다수를 차지한 의회와 싸워야 하고, 적대적으로 변한 국민 여론이나 회의에 젖은 군부까지 다독거려야 하던 대통령은 무엇보다 외톨이가 될까 두려워했다.

그러나 군 총사령관이라는 헌법적 특권 덕분에 대통령은 2002년 10월 11일 이후로 운신의 폭이 한결 자유로웠다. 전쟁을 선포할 수 있는 유일한 권한을 지닌 의회는 완전히 형식에 불과한 토론을 가진 후, “대통령이 이라크의 지속적인 위협에 국가안보를 지키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무력을 사용하는 권한을 대통령에게 허락했다.  하원에서는 293 대 133으로 가결됐고, 상원에서는 77 대 23으로 통과됐다.

이런 권한의 위임은 이제 와서 되돌릴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적잖은 의원을 당혹감에 빠뜨렸다. 존 케리, 존 에드워즈, 힐러리 클린턴 등 대통령 후보감을 비롯해서 민주당 의원의 과반수가 전쟁을 지지했다.그러나 이제는 분위기가 완전히 뒤바뀌어서 이란과의 전쟁을 선포하기 위한 투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다. 따라서 병력 증강이 테헤란(이란의 수도) 정권과의 전쟁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핑계거리를 제공할 가능성이 없지 않다. 물론 현재로서는 이란과의 전쟁을 미국 국민, 의회, 대부분의 군사령관이 반대하는 분위기이다.

하지만 이라크에서 미군의 피해를 이란의 개입(무기 인도 등) 탓으로 돌리면서 대통령은 미국 의회와 전 세계에 이란과의 전쟁을 위해 허락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점을 넌지시 알렸다. 정당방위라는 명목으로 군사 보복을 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병력 증강의 요구에 의회는 상징적으로 불신임 결의안을 채택하거나, 우리 군인들을 버렸고 위험에 빠뜨렸다는 욕을 먹더라도 군수품의 보급을 중단하는 등의 인기 없는 조치를 취할 수도 있다.

2월 16일 하원은 군부를 지원한다는 입장과 더불어 병력 증강을 반대한다는 입장을 동시에 표명한 결의안을 246 대 182로 통과시켰다. 17명의 공화당 의원이 민주당의 의견에 동조한 반면에, 민주당에서는 두 의원만이 결의안에 반대했다. 다음날, 상원에서는 7명의 공화당 의원을 포함한 56명의 의원이 병력 증강에 반대한다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를 반대한 의원은 34명이었다. 그러나 소수에게 검토 자체를 중단시킬 수 있는 권한을 허용한 상원의 특수한 상황을 고려할 때 그 결의안이 토론의 대상이 되기 위해서는 60명의 찬성의 필요했다.

행정부와 입법부 간의 다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3월에는 새로운 전략을 지원할 예산안의 심사가 시작된다. 지출을 샅샅이 조사하고, 파병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예산안 결의에 관련해 유례없는 제한조건을 부가하는 식으로, 예컨대 군인들이 재배치를 받을 때마다 1년간의 휴식을 의무화하는 식으로, 돈주머니의 끈을 쥐고 있는 의회는 부시에게 생각조차 하기 싫은 길을 선택하도록 몰아붙일 수 있다.
그렇게 한다면 4년 전에는 완수됐다고 천명한 소명, 그가 대통령으로서 내린 주된 결정이었던 소명이 참담한 패배로 끝났다고 고백하면서 점진적인 철군을 받아들이지 않을까.
/이브라힘 워드·번역 강주헌


* 이브라힘 워드는 플레처 법률 및 외교 대학원 조교수(매사추세츠 메드포드). <두려움의 대가 : 테러와의 금융 전쟁 뒤에 감춰진 진실>(I. B. Tauris, Londres, 2007)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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