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락기 인천문화재단 강화역사문화센터장
새 정부의 문화체육관광부장관 인선과정에서 그의 역사 인식을 두고 논란이 있었다. 이른바 ‘유사 역사학’적 관점에 빠져있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과 그가 국회의원 시절 여러 회의에서 발언한 내용이 함께 떠오른 것이다.

‘유사 역사학’이란 표현이 정확히 어떤 걸 가리키는지는, 의견이 엇갈린다. 좀 뭉뚱그려서 학술적 토론보다는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걸 즐겨하며 과거에 집착하는 태도라고 해둔다.

“당시의 다섯 군은 모두 평주에 딸렸고, 평주는 요동 양평을 치소로 삼았으니 어찌 다섯 군 지역이 모두 요동의 경계 안에 있었겠는가. 이런 이치는 없는 것이다. 압록강 서쪽에서는 낙랑과 대방의 자취를 찾을 수가 없다”

“왕씨(왕건)는 그 사신을 귀양 보내고 그 낙타까지 죽였다. 이는 발해를 위해서 한 일이 아니고 그 뜻이 장차 의리에 따라 강토를 조금 더 넓히려고 했던 것이니, 마치 군사는 곧은 것이 장(壯)하다는 것과 같다. 불행하게도 나라를 다 회복하지 못하고 그 이듬해에 몸이 죽었으니 천의(天意)에는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대씨(발해)의 흥망이 우리나라에 무슨 관계가 있어서 이토록 심하게 끊어버렸겠는가?”

위는 다산 정약용의 말이고, 아래는 성호 이익의 말이다. 다산은 우리 역대의 강역을 나름대로 상세히 조사한 결과 낙랑과 대방은 압록강 서쪽, 즉 만주에서는 찾을 수 없다고 했다. 다시 말하면 압록강 동쪽, 즉 한반도 안에서 찾아야한다는 말이다. 성호는 거란 사신을 귀양 보내고, 선물로 보내온 낙타를 만부교 밑에 묶어둬 굶어 죽게 했다는 고려 태조 왕건의 조치를,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에 대한 적대적 감정으로 이해하며 고려와 발해 간 동족의식이 있었다고 배워 온 우리를 당혹하게 한다. 발해의 흥망이 우리나라와 무슨 관계가 있냐는 말속에 성호의 관점이 명확히 들어있다.

여기서 역사 연구의 기본을 생각해본다. 우리 고대 역사지리에 대한 고증은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시작한 것이 아니라 이미 조선 후기부터 활발히 이뤄져왔다. 역사인식도 마찬가지여서 성호의 발해 인식과 달리 영재 유득공은 발해를 남북국시대로 평가하고 고려에서 발해 역사를 편찬하지 않은 걸 비판하기도 했다.

한나라 무제가 설치했다는 낙랑군이 현재의 평양에 있었는지, 요서지방에 있었는지는 문헌 사료와 고고학 자료 등을 망라해 연구하면 될 일이다. 많은 연구자들이 현재의 평양에 낙랑군이 있었다고 보는 것은 현재까지의 관련 자료를 따져볼 때 가능성이 가장 높다는 의미다. 새로운 자료와 증거가 발견되면 거기에 따른 위치 비정을 시도할 것이다. 그게 역사 연구의 기본이다. 아홉 개의 증거가 평양을 가리키고 있는데, 하나의 증거가 모호하다면 어느 것을 따라야할까?

역사학은 하나의 체계를 갖춘 학문이다. 그저 재미있는 옛날이야기가 아니다. 근거가 부족한 주장은 도태돼야하고, 사실 왜곡은 발붙일 수 없어야한다. 또, 역사학은 살아있는 학문이다. 지금 이 순간도 어딘가에서 새로운 자료와 관점이 나타나고 있다. 끊임없는 분석과 토론이 이어지며 학설의 수정과 보완, 재해석이 반복된다. 그 과정에서 하나하나 따지는 게 역사학의 본령이고 역사학자의 본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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