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에 입학한 직후였다. 그날은 우리 집 가정방문을 하는 날이었다. 선생님은 아이들을 몇 명씩 나눠 미리 조를 짜두었다. 각자 점심을 먹고 교문 앞에서 모였다. “누구 집부터 갈까?” 한 아이가 “우리 집부터 가요”라며 선생님 팔을 잡아끌었다. 마침 학교에서 제일 가까운 곳이었다. 선생님과 함께 그 친구네 집으로 향했다. 선생님이 친구네 집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나와 다른 아이들은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두 번째 친구네 집은 조금 더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렇게 세 번째 집까지 다니는 동안 어쩐지 우리 집과 정 반대 방향으로 갔다. 네 번째 집은 저 멀리, 오르막 중턱에 있었다. 우리 동네 집들과 달리 대문과 마당이 없는 집이 많았다. 친구와 나는 둘이서 좁은 오르막길을 뛰어 올랐다. “같이 가자”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선생님은 잠시 멈춰 선 채 가쁜 숨을 고르고 있었다.

선생님이 마지막 친구네 집으로 들어가고 나니 나는 혼자가 됐다. 친구네 집 앞을 서성이는 그 시간이 몹시 길고, 낯설었다. 아마 선생님이 몇 분만 더 늦었다면, 나는 낯섦을 견디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울음을 터트렸을지도 모른다.

▲ ⓒ심혜진.
아까 들렀던 친구네 집들을 다시 지나고, 학교를 지나고, 드디어 우리 집으로 가는 길목에 들어섰다. 어느덧 초저녁 바람이 불고 있었다. 엄마가 우리를 반겼다. 엄마는 선생님 앞에 작은 찻상을 내왔다. 나도 상 옆에 앉았다. 상엔 귤과 김치전이 올라와 있었다. 두 분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 눈은 오로지 김치전이 담긴 접시를 향해 있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접시였다.

나는 엄마와 선생님의 대화가 잠시 끊긴 틈을 타 엄마에게, 저 접시를 새로 샀는지, 작게 물어보았다. 엄마는 대답 대신 다른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 말을 못들은 것 같아, 엄마 팔을 흔들며 조금 더 크게 물었다.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왠지 선생님이 가신 뒤에 엄마에게 혼이 날 것 같아 그만 물어보기로 했다.

이야기가 끝나갈 무렵, 엄마가 방바닥으로 하얀 봉투를 밀어 선생님 앞에 놓았다. 선생님은 “아니에요, 아니에요”라고 손사래를 쳤다. 결국 봉투는 선생님 손으로 넘어갔다. 엄마가 선생님께 김치전을 권했다. 선생님은 음식을 많이 먹어 배가 부르다며, 한사코 먹지 않았다. 선생님이 내 손에 귤 두 개를 쥐어줬다. 쑥스러운 듯 웃는 얼굴로, 내게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했던 것 같다.

선생님이 집을 나간 뒤, 엄마는 김치전을 먹어도 된다고 했다. 김치전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엄마는 접시를 비워 깨끗이 닦은 후 귤 몇 개를 담아 밖으로 나갔다. 하루 종일 돌아다녀 피곤했던지 엄마가 나간 사이 잠이 들었다. 설핏 잠에서 깼을 때, 퇴근한 아빠와 엄마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빠는 “그러려고 다니는 거지 뭐”라고 말했다. 나는 흰 봉투를 떠올렸다. 그날 저녁상 한 가운데엔 다시 김치전이 올랐다.

어느 집에선가 빌려왔을 접시와 김치전, 하얀 봉투, 어두웠던 단칸방, 혼자 서 있던 낯선 동네, 그 가난한 동네의 오르막을 힘겹게 오르던 선생님. 입학철만 되면 떠오르는 이미지들이다. 30년도 넘은 어린 날의 기억을 아직도 붙들고 있는 건 무슨 이유일까. 그날, 아빠의 말은 사실이었을까? 궁금하면서도 한편으론 궁금하지 않다. 그래서 서글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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