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들의 얼굴은 나의 도화지”
“배우들의 얼굴은 나의 도화지”
  • 김영숙 기자
  • 승인 2017.02.08 10: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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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사람] 이정희 분장사

지난 2005년 청룡영화제에서 영화 ‘너는 내 운명’으로 남우주연상을 탄 영화배우 황정민은 “잘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만 얹은 것일 뿐”이라는 소감으로 더 유명해졌다.

영화나 연극을 종합예술이라고 한다. 무대에 오르는 배우 몇 명이 작품을 만드는 게 아니라 다양한 예술장르의 수많은 예술가가 한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힘을 모으기 때문이다. 영화의 엔딩 크레디트나 연극의 팸플릿에 공연 관계자들의 이름이 오르지만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건 주연 배우들이다. 배우 황정민의 발언은 그래서 적절하다.

지난달 25일, 분장사 이정희(39)씨를 만났다. 그녀는 프로페셔널 메이크업 팀(professional makw-up team) EU(異愈) 대표이기도 하다.

아버지한테 반항하고 싶어 포기한 미술

▲ 이정희 분장사.
인천에서 태어나 초ㆍ중ㆍ고등학교를 인천에서 졸업한 이 대표는 고교 때부터 화실을 다니며 미술대학 진학을 준비했다. 디자인을 전공한 그녀는 전국대회에서 문화체육부장관상과 인천시교육감상을 수상했다. 전국대회에서 실력을 인정받아 특기자로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지만 거부했다. 아빠에 대한 반항이었다.

“고등학교 때 방황이 심했어요. 사춘기를 심하게 겪었거든요. 아빠에 대한 소심한 복수였는데, 인생이 바뀌게 됐죠. 당시 학교와 학원 선생님들이 다 놀랐어요. 특기자로 갈 수 있는 대학을 안 갔으니까요. 그때는 철이 없어서 아빠를 아프게 하고 싶었어요. 아빠가 너무 무서웠거든요”

고교를 졸업하고 미련을 못 버린 그림 공부를 하다가 그것도 정리하고 미국으로 갔다. 미국으로 건너간 그녀가 생계를 위해 찾은 건 ‘그림’이었다. 교민들의 자녀들을 상대로 미술 과외를 했는데, 엄마들 사이에서 꽤 인기가 있었다. 아이들이 대회에 나가 상을 많이 탄 덕분이다. 벌이는 제법 괜찮았지만 그럴수록 더욱 외로웠다. 결국 무작정 미국을 떠나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찾은 곳이 부평에 있는 ‘MBC 아카데미’였다.

“한 친구가 내가 그림을 그렸던 재주가 있으니까 뭐라도 배우면 잘 할 거라고 그곳을 안내하더라고요. 거기서 온몸에 페인팅을 한 사람의 포스터를 봤는데 엄청 화려하고 멋있어 보였어요. 그걸 배우고 싶다고 하니까, 메이크업을 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시작했죠”

그때 나이 29세였다. 가족들이 모두 말렸다. 학원비도 만만치 않았다. 당시 6개월에 300만원이었다.

“제가 고집이 있어요. 한번 꽂히면 해야 하거든요. 좀 무모한 면도 있죠(웃음)”

그렇게 도전해 취득한 국가자격증이 여러 개 있다. 물론 자격증을 취득하기 위해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했다. 그러나 자격증보다 현장에서 순발력을 발휘해 적응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그녀는 강조했다.

“시간과 돈을 낭비하는 경우가 많아요. 대학에도 관련 학과가 많이 생겼는데 필요 없는 교과과정이 있습니다. 자격증이 중요한 게 아니라 현장에서는 일을 해내는 게 중요하고, 무슨 작품에 참여했는지가 중요합니다”

권위를 앞세우기보다 대등한 관계 추구

이 대표는 후배들에게 공연작품에 참여하면 팸플릿에 이름을 꼭 넣어야한다고 거듭 말한다.

“그게 이력이고 증명이에요. 저희 선배들은 대표 이름만 넣는 경우가 많았어요. 저는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을 다 넣어주려고 해요. 후배들한테도 그게 자산이거든요. 외국에서 특수 분장을 전문적으로 공부하려면 현장에서 몇 년간 작품에 참여했던 증거를 제출해야 해요. 그럴 때 팸플릿은 중요한 자료가 됩니다. 지금도 선배들 중에는 후배 분장사들이 후배이기 전에 경쟁자라서 넣어주지 않는 경우도 있죠”

분장팀을 운영하고 있는 이 대표에게도 어려웠던 시절이 있었다. “많이 당했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녀는 계약직으로 인천국제공항에서 일한 적이 있다. 한국문화재단이 한 ‘왕가의 산책’이라는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다. 이 행사는 인천국제공항을 이용하는 방문객들이 조선시대 왕과 왕비를 비롯한 왕족을 만날 수 있는 시간으로, 궁중왕실의 일상 모습을 재현한 퍼포먼스다. 궁중복식이나 의장물을 착용한 출연진이 공항 출국장이나 한국문화의 거리에서 조선시대 왕가의 산책을 재현해 퍼레이드를 펼친다. 원하는 사람들과 기념촬영을 하기도 한다. 지금도 인천국제공항에서 진행하고 있다. 이 대표는 이 사업이 시작된 2010년께 분장사로 함께했다.

“퍼레이드에 참여하는 사람이 약 15명이었어요. 배우도 있고 일반인도 있었는데 어떤 여성의 텃새가 엄청 심했어요. 별 이유 없이 심통을 부렸는데 그때 마음고생이 심했죠. 그래도 끝까지 버텼어요”

그녀는 뮤지컬 작품에 참여했던 경험도 들려줬다. ‘앙상블 배우’(=뮤지컬 주인공 뒤에서 함께 춤추고 노래하는 배우. ‘함께’라는 뜻의 앙상블이라는 단어를 사용함)가 무슨 일로 화가 났는지 후배 분장사가 분장을 하려 하자 얼굴에 붓도 못 대게 해 분장실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제가 왜 그러냐고 나섰죠. ‘우리도 전문가다. 배우들을 시중드는 사람이 아니다. 여기가 동네 미용실도 아니고 다른 곳에서 난 짜증을 우리한테 풀지 마시라. 목소리 낮추고 진정하시라’고 하니까, 복도에 나가서 소리를 지르고 내 욕을 하더라고요. 후배는 그런 경우가 처음이라 화장실에서 울고요. 잘 마무리됐지만 속이 많이 상했습니다”

“우리는 공연을 같이 만들어가는 사람”

▲ 인천 출신 가수 최민수씨가 뮤직비디오를 찍기 전, 이정희 대표가 메이크업을 하고 있다.
이 대표의 말로는 배우가 다른 데서 받은 스트레스를 분장사들에게 푸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고 한다. 공연 스태프 중에 가장 가깝기 때문이란다.

“배우들의 머리와 얼굴을 만지니까 자연스레 스트레스를 푸는데, 어느 정도까지 받아주느냐가 문제인 거죠. 메이크업 기술만이 아니라 사람을 상대하는 직업이라 많이 긴장되고 피곤해요. 우리의 일도 전문적인 예술이지만 배우들을 위로해야하는 서비스업이기도 합니다”

이 대표는 서울에서 뮤지컬 공연에 참여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큰 경험을 했다.

“어떤 남자 배우가 노래를 힘차게 불러야하는데 힘들어하더라고요. 우리는 무대를 직접 보지 않더라도 분장실에서 노래를 들으면 공연을 대충 파악할 수 있어요. 반은 배우가 된 거죠. 어느 날 분장실에서 그 배우의 노랫소리가 들리는데 심장이 떨리더라고요. 1부 공연이 끝나고 그 배우가 분장실에 내려왔을 때 ‘멋있었다’고 얘기하니까, 힘을 내더라고요. 공연이 다 끝나고 내게 오더니 아이처럼 자기 어땠냐고 묻는데, 우리의 말 한마디가 무대에서 관객을 상대하는 배우에게 에너지를 줄 수 있는 힘이 된다는 걸 느꼈어요. 영화 찍을 때 배우가 기분이 안 좋으면 연출자나 스태프들이 우리에게 귀띔을 해줘요. 분장하면서 달래주고 치유해주라고요. 그래야 ‘슛’ 들어갈 때 잘 할 수 있다고요. 우리는 반은 상담사가 돼야 해요”

권위를 세우는 분장사도 많지만, 이 대표는 뮤지컬 배우와의 경험 이후 생각이 바뀌었다. 무대에 오르기 전 마지막까지 배우를 돌봐주는 사람이 분장사이기에 배우가 최상의 연기를 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분장사의 임무란다.

‘분장사는 공연을 같이 만들어가는 사람들’이라고 강조하는 이들은 배우들을 어떻게 분장할까?

“사악하거나 심술궂은 역을 맡은 배우들을 분장할 때는 모든 경험을 동원해 성격에 맞는 이미지를 떠올려 분장해요. 작품에 참여하면 대본을 읽고 등장인물의 캐릭터를 분석해야합니다. 게다가 성격이 고정적이지 않잖아요. 언제, 어떻게 변하는지도 분석해서 헤어나 분장을 다시 하고 소품도 바꿔야하고요. 배우들이 많이 변할 때 가장 힘들어요. 1분 안에 머리와 분장을 바꿔야하는데 시간이 부족하면 무대에 오르기 직전까지 쫒아가며 할 때도 있어요. 백조가 우아하게 떠 있지만 물 아래에서는 엄청난 발질을 하잖아요. 우리도 비슷해요. 분장실에서는 난리가 나지만 무대 위에 오르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여유롭게 행동해야 하잖아요. 영화 작업은 달라요. 엔지(NG)가 있으면 다시 하면 되니까 여유롭지만 좀 지루하죠. 저는 연극이나 뮤지컬 같은 스릴을 즐겨요. 내가 분장한 배우들을 무대 위에 올려 연기하는 모습을 보면 내 자식을 올린 느낌이에요. 배우 한 분 한 분이 모두 애틋합니다”

분장을 하면서 가장 속상할 때가 역할에 맞지 않는 분장을 요구할 때란다. 예를 들면 할머니 역할을 하는 배우가 젊은 여성처럼 예쁘게 해달라고 할 때다.

“우리를 성형외과 의사로 착각하기도 해요. 얼굴을 작게 해 달라, 턱을 깎아 달라고 요구하는데 ‘더 깎으면 원숭이 됩니다’라고 대꾸하기도 하죠. 우리는 분장사지만 조명을 볼 줄도 알아야합니다. 조명의 종류나 위치에 따라 분장을 달리해야해요. 핀 조명일 때 눈썹을 진하게 하면 눈두덩이 꺼멓게 나오거든요. 배우들이 고집 부리는 경우가 있는데, 저는 무대 위가 가장 중요합니다”

“배우 한 명 한 명은 모두 내 작품”

▲ 인천독립영화협회가 만든 ‘전갈자리’ 촬영을 하며 모니터링을 하고 있는 스태프들. 뒷줄 가운데가 이정희씨다.
이 대표는 어릴 때부터 연기자 김상경을 동경했다고 한다. 그가 결혼한다고 했을 때 속상할 정도로 좋아했고 보고 싶었다고도 했다. 그러다 영화 ‘아빠를 빌려드립니다’에서 주인공 역을 맡은 그를 만났고 그녀가 직접 분장을 했다.

“정말 행복했죠. 그는 연기만 잘하는 게 아니라 연기를 하면서 카메라 앵글과 조명을 다 볼 줄 알더라고요. 스태프들에게 다양한 주문을 하는데 그 모습이 정말 멋있었습니다. 이순재 선생님하고는 영화 ‘지젤, 다시 태어나다’라는 작품에서 만났는데, 대단하신 분이었어요. 80세가 넘었는데도 긴 대사를 실수 없이 한 번에 하시더라고요. 드라마에서는 코믹한 역할을 많이 하셨는데 실제는 점잖고 조용히 얘기하셨어요. 여전히 정정하시고 멋있었습니다”

연극과 영화, 뮤지컬 등 다방면에서 활동하는 이 대표는 1년에 평균 20여개 작품에 참여한다. 인천이나 서울만이 아닌 전국 출장도 많다.

“저는 이 일을 사랑합니다. 내 성격과 잘 맞는 거 같아요. 배우들은 나한테 도화지 같은 존재이고 내 작품입니다. 무대 뒤에서 공연을 볼 때 애절하고 자식 같다는 게 이런 느낌 때문이죠. 무대 뒤에서 감정이 벅차올라 눈물이 난 적이 많아요. 주연이든 조연이든 배우 한 명 한 명은 모두 내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