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평론] 뜨거운 피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16.10.10.

 
오랜만에 손에 땀을 쥐며 소설 한 권을 읽었다. 정말, 흥미로웠다. 이 작가가 왜 이런 변신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눈에 보이는 것이 다인 것 같은 세상에 과연 그렇겠냐고 물었던 작가다. 상상하게 했고, 음미하게 했고, 고민하게 했다. 소설 제목도 그래서 인상 깊었다. ‘캐비닛’ ‘설계자들’. 그런데 이번에는 안 그랬다. 한번 손에 잡았으면 절대 놓지 않게 하겠다는 게 소설을 쓴 목적인양 독자를 마구 몰아간다. 아마도 이런 기획이었다면 그는 성공했다. 무슨 소설이길래 호들갑 떨며 소개하는가, 궁금할 터. 김언수의 장편소설 ‘뜨거운 피’를 읽고 하는 소리다.

김언수는 한국문학의 지도책에 부산과 그 항구들을 확실하게 등재한다. 전작에도 그랬듯 이번에도 부산의 항구들이 배경이다. 이 부산 사나이는 그 항구에 얽힌 욕망과 그 허전함을 거푸 토해내지 않고서는 못 배기는 모양이다. 건달들 이야기다. 아니 조폭들 이야기다. 그래서 누아르를 떠올리게 한다. 사내들의 이야기이다 보니 뜨겁다.

전쟁미망인들을 구호하는 모자원에서 자랐다. 이탈리아에서 온 신부가 실수했다. 이곳 아이들에게 권투를 가르쳐주었던 것. 먹고살려고 어린 나이에 부산의 건달이 됐다. 희수. 나이 마흔에 지난날을 회한에 차 되돌아보고 앞날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주인공. 그가 소속한 건달세계는 구암의 손 영감을 우두머리로 삼는다. 여기서 구암은 가상의 공간이니 소설 읽다가 갑자기 부산지도를 펴보지는 말 것. 손 영감은 특유의 처신으로 구암 바닷가를 장악해 배를 불리고 있다. 바둑도 혼자 두고 보트 타고 섬에 가 혼자 낚시를 즐긴다. 능구렁인데다 책사다. 뒷칸방에 밀려난 노인네 같지만 그의 머리는 비상하다. 그의 지론은 단순하다. “건달은 그저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지내는 게 성숙하고 아름다운 자태라고”

구암의 대척점에 영도파가 있다. 구암이 먹을 거 별로 없는 지역구라면, 영도는 탐욕스러운 전국구의 조폭이다. 여기는 남가주 회장이 우두머리다. 공산당에 밀려 만주부터 떠내려 와 부산에서 일가를 이뤘다고 자부한다. 탐욕스럽고 무자비하다. 노골적이고 공격적이다. 돈 버는 규모가 구암과는 다르다. 용강이나 천달호 같은 이들을 휘하에 거느린다. 처음에 두 세계는 공존하는 듯싶다. 작은 마찰이 있었으나 쉽게 봉합될 거라 예측하게 했다. 그러나 김언수는 그 예측을 깬다. 피가 낭자하다. 죽고 배신하고 차지하고 다시 배신하고, 결론이 어디로 갈지 종잡을 수 없다.

문제는 항구였다. 영도가 밀수에 이용했던 항구를 더는 쓸 수 없었다. 그래서 구암의 항구를 뺏어야했다. 손 영감과 남가주 회장의 대결에 아랫것들이 희생된다. 건달들 세계에 의리는 없다. 돈이면 다 됐다. 건달을 다룬 소설에 이토록 배신이 많이 나오는 것은 처음 보는 듯하다. 무게 잡고 화려하고 있어 보이지만, 알고 보면 다 찌질이들이다. 그 세계를 한 방에 돈 벌어 벗어나려 하지만 그 한 방은 늘 유예되고, 그 한 방에 대한 미련 탓에 목숨을 잃는다.

소설 말미에 희수, 양동, 용강, 철진, 천달호, 남가주 회장이 멍텅구리 배에 모인다. 희수가 항복을 선언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일대 반전이 일어난다. 정말,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었다. 희수는 손 영감의 뒤를 이어 구암의 우두머리가 된다. 첫사랑이었던 창녀 인숙과 결혼했지만, 떠났다. 인숙의 아들 아미는 죽었다.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다시, 혼자다. 회장 자리에 오르기 직전, 희수는 바닷가에서 걷잡을 수없는 울음을 토해낸다. 그리고 출렁거리는 바닷물에 얼굴을 씻는다. 인생의 대전환점이다.

김언수의 문장은 날렵한 칼잡이의 솜씨를 닮았다. 짧게 끊어 쳐 쓰나 가슴에 팍 박혀 들어온다. 구성은 단단하고 반전의 묘미가 있다. 흥미롭고 재미있다. 그런데 그렇기만 하다. 다 읽고 나서 음미하고 고민하고 되살펴보아야 할 바가 없다. 그전 작품을 좋아하던 이로서 당혹스럽다. 왜 이런 변신을 했을까. 소설이란 본디 시정잡배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면 족하다고 여겨서일까? 철학자인양 넋두리 늘어놓는 소설에 구역질이 나서일까? 모르겠다. 그래도 소설이 재미를 되찾은 점은 상찬할만하다. 책을 덮은 지 꽤 됐건만, 아직도 피가 뜨겁게 흐르는 듯하다.

/도서평론가 이권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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