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성원 <황해문화> 편집장, 인천사람과문화의 ‘인천마당’서 강연

“출생, 초ㆍ중ㆍ고등학교 입학이나 졸업, 결혼 등, 사람마다 인생의 변곡점이 있는데, 그때 역사적으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야, 역사속의 나를 파악할 수 있다. 나는 1970년생이다. 노동이 천시 받던 시대, 전태일 열사가 죽던 해에 태어났다. 그때는 박정희가 대통령이었다. 내 딸은 박정희의 딸이 대통령인 시대에 살고 있다. 중학생일 때 성당에서 광주항쟁 비디오를 봤다. 그때 봤던 비디오 장면이 잊히지 않는다. 그때부터 내가 변했다. 1987년 6월 항쟁 때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항쟁을 겪은 국민들이 노태우를 대통령으로 뽑은 걸 보면서 실망했다. 건설현장에서 일하고 저녁에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아파트를 보면서 ‘저기에 사는 숱한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지 않는 한 세상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라는 생각에 공부를 했다. 우리를 둘러싼 일상과 세계를 이해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사단법인 인천사람과문화(이사장 신현수)이 지난 11월 30일 저녁 부평아트센터 2층 세미나실에서 개최한 ‘48회 인천마당’에 강사로 초대된 전성원(사진) <황해문화> 편집장이 강연을 시작하며 한 말이다. 전 편집장은 이날 ‘출판을 통해 본 한반도 냉전과 반공이데올로기의 기원’이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아래는 강연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반공이데올로기의 기원, 미군정 1000여일

▲ 전성원 <황해문화> 편집장.
1945년 8월 15일 일제로부터 해방된 후 미군정 2년 11개월을 지냈다. 날수로 치면 1000여일이다. 대한민국이 만들어져 지금까지 왔는데, 박근혜 정권이 파국을 맞고 있다. 누구는 ‘1987년 체제’의 종말이라고 하는데, 나는 ‘1948년 체제’의 종말이라고 본다. 지금 바꾸지 않으면 다시 바꾸기 힘들다.

우리를 정신적 불구로 만든 냉전과 반공이데올로기의 기원은 언제부터였는지 ‘출판’을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일제강점기를 연구한 사람은 많아, 연구의 진전이 있다. 그러나 해방 전후시대의 좌파 서적은 지난 40년간 읽을 수가 없어 학문적으로 연구할 수 없었다.

먼저 1945년을 ‘해방’이라고 부르는데 과연 해방인지, 무엇으로부터 해방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일제가 물러갔지만 곧이어 미군정이 들어왔다. 일본으로부터 해방돼, 미국을 해방자로 보는 경향이 있다.

식민지 조선의 특수한 상황이 있다. 필리핀이나 인도네시아, 버마, 베트남 등, 식민통치를 겪은 경험이 있는 다른 나라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식민통치 경험이 짧다. 또한 일제로부터 해방과 동시에 미국과 소련의 직접통치를 받았다는 점에서 ‘점령’이라는 속성을 동시에 갖고 있다.

1945년 9월 8일 인천을 통해 점령군으로 들어온 미군정은 경제정책에서 실책을 저질렀다. 통화를 무분별하게 발행했고, 토지개혁 없는 적산불하를 했으며, 물가정책도 실패했다.

이에 반해 미군정의 공보활동은 왕성했다. 태평양미육군총사령부 포고 1호를 통해 ‘종전 후 조선 민중이 스스로 통치할 수 없을 것’이라는 논리를 내세워, 미군정은 38도선 이하 남한 지역 내에서 유일한 권력임을 천명했다.

미군정은 신문이나 잡지, 영화, 라디오방송 등, 다양한 미디어를 활용해 미국의 대외문화정책을 홍보했다. 호혜주의와 인도주의에 입각한 민간 문화교류를 지향한다는 걸 밝혔다. 힘의 정치를 추구하지만 독트린(doctrine)을 통해 미국 외교를 정당화했다. 부시 대통령이 ‘인권’이라는 명분(실리는 석유)으로 이라크를 침공한 것처럼 한반도에서도 그랬다.

미군정, 일제의 통치기구 이어받아

미군정의 행정조직은 일제의 통치기구를 해체하기는커녕 잔존시키고 강화했다. 일제에 부역했던 친일파와 경찰조직을 복귀시켰을 뿐만 아니라 법체계 또한 계승했다.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은 ‘8.15 해방을 맞아 광복된 것은 우리 민족이 아니라 친일파들’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일제강점기에 노동운동이나 독립운동을 하면 ‘빨갱이’였다. 일본경찰이 그 명단을 자료로 만들었다. 해방되고 그 자료를 미군정이 갖고 있다가 나중에 한국경찰한테 넘겨줬다. 그 자료가 경상도 어느 군청에서 발견됐다.

미군정 초기에는 ‘언론의 자유를 누렸다’는 기록이 있어, 연구했는데 아니었다. 미군정이 들어서고 신문이나 출판물이 허가제에서 등록제로 바뀌어서 그렇게 기록한 것 같은데, 등록제 요구조건이 엄청 많았다.

미군정의 공보부는 출판ㆍ인쇄를 검열하고 선전활동을 담당했다. 막강한 권력으로 남한 여론의 좌경화를 인식해 언론통제에 착수했다. 정치단체를 등록하게 한 뒤 등록하지 않은 단체는 불법단체로 규정해 탄압했다. 좌익성향을 조금이라도 보이는 신문의 등록을 취소하거나 폐간시키는 통치로 정치적 저항을 탄압할 수 있는 막강한 권력기구로 자리 잡았다.

해방공간에서 대중의 정서는 좌익과 우익의 차이가 별로 없었다. 소설가 김동리는 우익적 성향인데 ‘좌우간의 좌우’라는 글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만약 토지개혁과 주요기업의 국유를 주장하는 것이 좌익이라면 조선 사람은 전부 좌익이요. 민족해방과 완전 독립을 갈망하는 것이 우익이라면 조선 사람은 전부 우익일 것이다. 조선의 소(=소련)연방화 거부를 우익이라면 우리는 모두 우익이어야 할 것이고 조선의 미국 식민지의 배격을 좌익이라면 우리는 모두 좌익일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좌익이 호평 받은 이유는 숨 쉴 수 없을 만큼 억압된 상황에서 민중들의 정치의식이 고양됐기 때문이다. 당시는 좌익이 항일로 해석됐다.

이념 검열은 계속되고 있다

▲ 전성원 <황해문화> 편집장은 “아직도 이념 검열은 계속되고 있고, 지금 바꿔야한다”고 강조했다.
미군정은 미디어 헤게모니 장악 방식으로 인쇄시설을 ‘적산불하’했다. 미군정 일주일 만에 조선인쇄주식회사를 접수했고, 그밖의 여러 인쇄시설도 모두 접수했다. 좌익성향의 <매일신보>의 경영권 장악 시도를 실패하자, 발간 정지를 명령했다. 그 후 <매일신보> 인쇄시설을 뺏어 <조선일보>에 넘겼다.

인쇄용지가 귀했던 때, 미군정은 용지 배급을 통해 통제했다. ‘조선해방연보’를 보면, 1946년 7월까지 간행된 책 202종 중 좌익서적은 66종(32.7%)밖에 안 된다. 출판 수요를 뒷받침할 제지 생산시설이 부족해 좌익한테 용지를 주지 않았다.

미군정 초기에는 하지 중장이 언론자유를 표방했고, 출판계에 좌우 갈등도 없었다. 그러나 1946년 이후 갈등이 생기고 1947년 8월부터 좌익 검거 열풍이 불었다. 남한 단독정부가 수립되고, 여운형ㆍ김규식ㆍ김구 등이 암살당하는 시기다. 좌익 서적의 압수가 본격화돼 일본어로 된 마르크스의 ‘자본론’ 가격이 100배 또는 최고 1000배까지 뛰었다.

해방공간을 연구하면서 반성하는 게 있었다. 그 시대의 작품(=서적)을 읽지 않았다는 거였다. 하지만 1988년 이후에나 당시 작품들이 해금돼, 읽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빼어난 작품이 많지만, 전혀 접할 기회가 없었다.

김일성과 박헌영을 적혈구, 김구와 이승만을 백혈구, 여운형과 김규식을 혈소판에 비유해 보겠다. 우리 역사는 혈소판이 죽고 없다. 혈소판이 없으면 혈우병에 걸린다. 그러면 혈액 응고 인자가 결핍돼 피를 계속 흘린다. 지금 우리가 고통 받는 건 중간 세력(=혈소판)을 양쪽에서 죽였기 때문이다. 아직도 이념 검열은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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