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애 ㅣ 우리교육(2005)


동생 수향이를 데리고 사는 열일곱 소녀가장 수경이. 그녀에게 세상은 참으로 가혹하기 그지없다. 의지가지없는 수경이네를 거둬주는 목순네가 있고 방송통신학교를 소개해주고 영어공부모임까지 주선해주는 친구 유동이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수경이와 동생 수향이의 몸을 전쟁터 삼아 잔혹한 전쟁을 치른다.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 일본군의 성노예로 수경이의 나이를 보낸 애기할머니의 역사가, 일본의 식민지도 아닌 현재까지도 열일곱 수경이의 몸에서 또 다시 반복되는 것을 지켜보기란 차라리 고통이다.

그러나 열여덟을 맞는 새해 첫 날, 해맞이공원에서 상처투성이의 몸을 새해 첫 햇볕에 말리며 전쟁을 치른 상처투성이 몸과 화해를 시도하는 수경이를 보며, 다시 한 번 ‘희망’이란 단어를 읊조리게 된다. 수경이가 애기할머니와 봉선할머니의 아픈 역사를 통해 자신과 동생의 상처를 싸매고 치유하는 지혜를 얻었듯, 이 책을 읽는 독자 역시 수경이를 통해 겨울바람에 얼고 햇볕에 녹기를 반복하며 웅숭깊은 고소함을 얻어내는 과메기처럼 상처 속에서 세상을 살아갈 용기를 얻는다.
열일곱 소녀 수경이의 성장소설 <환절기>는, 지금도 매 순간 전쟁을 치르며 자신의 몸과 화해하지 못한 이들에게 성장을 일깨우는 거름이 된다.


한겨레문학상 수상으로 세상에 이름을 알린 ‘박정애’는 전작 <물의 말>에서처럼 여성주의를 삶의 언어로 빚어내는 탁월한 능력을 보여준다. 이 사회에서 여자의 몸이 다뤄지는 방식이란 얼마나 폭력적인지, 이 사회가 어떤 방식으로 여자의 몸을 유린하는지, 이 책만큼 쉽고 생생하게 이야기해주는 책을 지금껏 만난 적이 없다.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로 버무린 그녀의 언어와 만나다 보면 그 동안 책상머리에서 골치 아픈 책과 씨름하며 의미를 찾아내고자 했던 추상과 관념이 살아 펄떡대는 날것의 현실로 치환되는 기쁨을 얻게 된다.


수경이가 숨쉬기를 멈추고 삶을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숨길을 터주었던 봉선할머니의 편지는, 세상을 다 살아낸 선배여성의 지혜로운 잠언이자 움츠려 있던 삶의 의지를 끄집어내는 주술이다. 70년 모진 인생을 꼭꼭 눌러쓴 봉선할머니의 편지가 수경이에게 깨달음과 힘을 주었듯, 소설 <환절기>는 여전히 끝나지 않은 환절기 속에서 앓고 있는 이들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그래도 곧 새로운 계절이 시작될 것’이라고 다독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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