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주 시민기자의 영화읽기 - 우리들

윤가은 감독│2016년 개봉

체육시간에 피구를 하면서 편을 가를 때면 가장 마지막까지 남겨지는 아이가 있다. 금을 밟지 않았는데도 친구들이 작당한 듯 ‘아웃’이라고 몰아붙이면, 제대로 항변하지 못하고 금 밖으로 나가는 아이가 있다. 울지도 못하고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친구들 뒤에서 쭈뼛거리는 11세 소녀 선(최수인)은 이른바 ‘왕따’다.

여름방학이 시작되는 날 선은 전학생 지아(설혜인)를 만난다. 외롭던 선과 전학 온 학교가 낯선 지아는 금세 단짝이 되고 방학 내내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새 학기를 시작하고 교실에서 만난 지아의 태도는 방학 때와는 딴판으로 냉랭하기 그지없다. 학원에 다니기 시작한 지아가 선을 따돌리는 보라(이서연)의 무리와 어울렸기 때문이다. 선은 어떻게든 지아의 마음을 돌리려 노력하지만, 그럴수록 선과 지아의 관계는 꼬이기만 한다. 결국 두 소녀는 서로 상대방의 비밀과 치부를 폭로하며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윤가은 감독의 장편 데뷔작 ‘우리들’은 초등학교 4학년 선과 지아가 주인공인 영화다. 지금까지 어린이들이 나온 영화들이 되풀이했던 그렇고 그런 ‘동심’ 혹은 ‘순수했던 옛 추억’에 관한 영화일 거라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영화 ‘우리들’은 가면을 쓰고 감정을 숨긴 채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가슴 밑바닥에 눌러 붙은 감정세포를 하나하나 되살리는 ‘인공호흡’과도 같은 영화다.

 
어른들은 입버릇처럼 아이들에게 ‘사이좋게 지내라’고 훈계하지만, 사실 어른들도 어떻게 해야 타인과 친해질 수 있는지 잘 모르고, 친하다고 믿었던 이에게 상처받고 배신당하며 산다. 누군가에 대한 동경과 질투, 어울림과 따돌림은 비단 초등학교 4학년 교실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11세 소녀 선과 지아가 서로 친해지고 서로 상처 주고 어떻게든 관계를 회복하려 애쓰고, 또 그러다 배신하는 과정은 결코 그 아이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영화 속 소녀들과 나 같은 어른이 다른 게 있다면, 어른들은 안 그런 척, 괜찮은 척, 자신을 감출 줄 안다는 것뿐이다. 그러나 설렘, 질투, 부러움, 미안함, 억울함, 미움, 원망과 같은 모든 감정을 말갛게 드러내는 선과 지아의 얼굴을 보면 그동안 어른인 척 하느라 꾹꾹 억눌러왔던 감정의 봉인이 한꺼번에 해제되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관객은, 때로는 새로운 친구를 만나 설레고 때로는 친구를 잃을까 전전긍긍하고 또 때로는 친구가 도대체 내게 왜 이러나 싶어 억울해했던 자신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각각의 ‘나’들이 ‘우리’가 되기까지 혹은 ‘우리’가 각각의 ‘나’로 결별하기까지의 과정은, 아이든 어른이든 당사자들에게는 여느 로맨스영화보다도 달콤하고 여느 공포영화보다도 무섭고 여느 블록버스터보다 스팩터클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상처받지 않으려 자신의 감정을 감추고 억누르며 짐짓 평온한 체 했을 뿐이다.
영화 ‘우리들’은 사람과의 관계에서 느꼈던 모든 감정을 하나하나 되살린다. 그리고 깨닫게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감정을 감추는 가면이 아니라, 상처받지 않기 위해 서둘러 뒷걸음질 치는 포기가 아니라, 솔직한 용기라는 것을.

감독의 말대로 ‘우리들’은 ‘상처받을까봐, 피곤하다는 이유로 관계 맺기를 지레 포기하고 영영 누구에게도 진심을 전하지 못하는 비겁한 어른’들에게는 가면 뒤에 감춰둔 솔직한 감정을 비추는 거울 같은 영화이자, ‘아프지만 용기 내어 한 발짝씩 다가가는 선과 지아 같은 아이’들을 응원하는 영화다.

지금까지 한국영화 중 이렇게 처음부터 끝까지 아이들이 이야기를 끌어갔던 영화는 없었다. 교실에서 벌어지는 미묘하면서도 격렬한 감정의 부딪힘을 이토록 섬세하게 그려낸 영화도 없었다. 영화가 보여주는 아이들의 세계를 보며, 선처럼 지아처럼 ‘우리’가 되기 위한 용기를 내봐야겠다. 아프더라도.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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