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주 시민기자의 영화읽기 - 눈길

이나정 감독|개봉 예정

 
작년 12월 28일 한ㆍ일 장관급회담의 ‘합의’는 역설적으로 한국사회가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해 어떤 해결도 하지 못한 채 70여년을 보냈다는 것을 확인해줬다.

피해 당사자를 배제한 합의에 국민 대다수는 분노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수요집회 1000회째인 2011년 11월 일본대사관 앞에 세운 이래 ‘위안부’의 상징이 된 소녀상을 지키기 위해 청년들은 겨울바람을 맞으며 밤을 지새웠다. 12.28 합의 무효를 외치는 촛불과 일인시위가 이어졌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인정도 진정을 담은 사죄도 없는 모호한 10억엔은 필요 없다며, ‘일본군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재단’이라는 민간재단 설립운동이 퍼져나갔다. 이듬해인 올해 2월에 개봉한 영화 ‘귀향’은 한ㆍ일 장관급회담 합의에 대한 국민적 공분에 힘입어 이례적인 흥행을 기록했다.

그러나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아직 별다른 해결의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한ㆍ일 정부 모두 ‘불가역적 합의’를 뒤집는 그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고 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여전히 현재진행 중인 일종의 ‘미제사건’이다. 미제사건을 해결하는 방법은 단 하나다. 잊지 않는 것, 기억하는 것. 잊지 않고 끈질기게 기억하는 자가 있을 때 언젠가는 해결할 수 있다.

여기 일본군‘위안부’ 이야기를 다룬 영화 한 편이 있다. 단순히 말초적인 분노를 자아내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묵직한 질문을 던지는 영화, 이나정 감독의 ‘눈길’이다. ‘눈길’은 지난해 <KBS>가 광복 70주년 특집으로 방영한 동명의 2부작 특집극을 영화로 재탄생시킨 작품이다. 일제강점기 한동네에 살던 영애(김새론)와 종분(김향기)이 일본군위안소로 끌려가 갖은 고초를 겪으며 서로 의지하는 과거의 이야기와, 현재 시점에서 독거노인으로 사는 종분(김영옥)이 이른바 비행청소년 은수(조수향)를 보듬으며 역시나 서로 의지하는 이야기가 번갈아 진행된다.

영화는 우리가 익히 들었던 일본군‘위안부’ 할머니들의 수난사를 담고 있지만, 일본군의 야만적인 폭력성과 대비되는 ‘조선 처녀의 순결’이 얼마나 짓밟혔는가를 선정적으로 그리기보다는, 전쟁과 국가폭력 아래 약자들이 어떻게 그 시절을 견뎌냈는가에 집중한다. ‘위안부’의 고통은 스펙터클한 폭력의 재현이 아닌 폭력 아래에서도 끝내 살아냈고 살아내려 했던 피해자들의 삶을 통해 오히려 효과적으로 전달된다.

또한 영화는 현재의 은수를 통해 약자와 여성에 대한 구조적 폭력이 지금도 여전히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무런 보살핌 없이 사회적 편견으로 상처 받으며 살아가는 은수는 영애와 종분의 현재 버전이다. 은수는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다 지난 과거사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현재의 문제이자 나의 문제임을 일깨운다.

영화는 고통스러운 과거사를 다루고 있지만 담담하다. 담담하지만 뭉클하고 따뜻하기까지 하다. 과거의 부잣집 딸 영애와 찢어지게 가난한 종분은 서로 어울릴 수 없던 처지였지만, 지옥 같은 위안소에서 서로를 지탱하는 버팀목이 된다. 현재의 독거노인이 된 종분은 기댈 데 없는 은수를 보살피고, 여전히 과거의 상처로 눈물 훔치는 종분에게 은수는 “그거 부끄러운 거 아니야. 그 새끼들이 잘못한 거지”라고 퉁명스러운 위로를 건넨다. 그렇게 약자들은 서로 손을 잡는다.

영애가 종분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것은 위안소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네가 이 애들 꼭 기억해야 돼” 종분은 영애의 마지막 말을 끝내 지켰고, 아마도 그랬기 때문에 은수를 보살폈을 것이다.

우리는 일본군‘위안부’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영화 ‘눈길’에서 과거의 종분과 영애, 현재의 종분과 은수가 보여준 연대. 그리고 한국군에게 피해를 입은 베트남 여성들에게 손을 내밀고 사과하는 ‘위안부’ 할머니의 현재. 여기에 답이 있다.

*현재 개봉 준비 중인 영화 ‘눈길’을 12회 인천여성영화제에서 미리 만날 수 있다. 7월 16일 오후 7시 30분, 영화공간 주안 3관에서 상영한다. 이나정 감독과 관객과의 대화도 마련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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