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주 시민기자의 영화읽기 - 아가씨

박찬욱 감독|2016년 개봉

그냥 지나쳐갈 영화가 될 줄 알았다. 박찬욱 감독의 스타일은 좋아하지만, 아무리 유명한 감독이라 해도 복수 3부작(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 이후 지루해진 건 사실이니까. 더구나 칸영화제 경쟁부분에 진출했다고 언론은 떠들썩했고, TV의 영화정보 프로그램이나 광고에 너무 자주 나왔다. 내가 안 보고 싶을 만한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개봉하자마자 ‘아가씨’를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곧장 극장에 갔다. 최근 몇 년간 이렇게 많은 관객이 든 상영관에서 영화를 본 건 처음인 것 같았다. 스포일러가 될 만한 광고도 방송도 모두 외면했고, 원작이었다는 ‘핑거스미스’도 보지 않았으니 영화에 대한 정보는 하나도 없었다. 마치 영화의 주인공 아가씨처럼 해맑은 관객이 돼 ‘아가씨’를 만났다.

오! 이런. 복수 3부작 이후 박찬욱 감독의 영화를 보지 않아서 섣불리 말할 수는 없지만, 따뜻한 휴먼드라마(?) ‘공동경비구역JSA’ 이후 끔찍하고 불편한 영화만 주구장창 만들어온 박찬욱 감독이 이토록 경쾌하고 유쾌하고, 사랑스러운 영화를 만들다니.

이야기는 대략 이렇다. 어릴 적 부모를 잃고 후견인 이모부(조진웅)의 엄격한 보호 아래 집 안에 갇혀 세상 돌아가는 것도 모르고 자라온 아가씨 히데코(김민희)에게 백작(하정우)이 추천한 새 하녀 숙희(김태리)가 찾아온다. 매일 이모부의 서재에서 책을 낭독하는 것이 전부인 아가씨는 숙희와 가까워진다.

 
숙희는 순박하고 어수룩해 보이지만 조선의 유명한 여도둑의 딸로 장물아비의 손에서 자란 소매치기 사기꾼으로, 막대한 재산의 상속녀인 아가씨를 유혹해 돈을 가로채려는 가짜 백작과 작당해 아가씨와 백작이 사랑에 빠지게 만들 임무를 띠고 하녀가 된 것이다.

영화는 총3부로 이뤄져 있다. 1부는 아가씨를 속여 백작의 계획을 성공시키려는 숙희를 중심으로, 2부는 1부에서는 해맑고 순진하게 백작과 숙희에게 넘어가는 걸로만 보였던 아가씨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1부와 2부의 이야기를 쌓다 보면 등장인물 모두 서로 속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과연 속이는 능력이 가장 출중해 최후의 승자가 되는 이는 누구일까.

여기까지는 마치 촘촘히 잘 짜인 스릴러 각본 같다. 흥미진진하다. 그러나 씨줄과 날줄처럼 각자의 눈속임과 사기가 교묘하게 그물망을 만들며 결론으로 치닫는 3부에 이르면, 우리는 알게 된다. 영화 ‘아가씨’가 정말 말하고 싶었던 것은 사기의 기술이 아니라 사랑의 힘이었다는 것을. 이전까지 관객들이 몰두해온 스릴러 각본은, 어쩌면 뻔하고 그렇기 때문에 아름다운 결론으로 가기 위해 감독이 파놓은 함정이었다는 것을.

이모부의 거대한 저택 안, 잘 빼입은 신사들의 뒤틀린 욕망이 오로지 자신들의 욕망의 대상으로만 가둬뒀던 아가씨. 아가씨와 숙희의 눈빛이 부딪히는 순간, 그녀들이 손을 마주잡는 순간, 한심한 남자들의 세계는 한없이 볼품없어진다. 아가씨와 숙희는 처음에는 위압적이어서 절로 어깨가 움츠러들기까지 했던 남자들의 성벽을 훌쩍 뛰어넘어 드넓은 바다로 향한다.

서로 속이는 과정이 쌓이는 전반부는 경쾌하기 이를 데 없고, 희망적 결말은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명쾌하다. 박찬욱 감독의 전작 중에도 유례없는 해피엔딩이다.

한국영화에서 이토록 온전하게 여자들이 승리한 이야기를 만난 적이 있었던가, 통쾌하기까지 하다. 여성에게는 폭력이기까지 한 남성 중심적 에로티시즘과 판타지를 가뿐히 뛰어넘어 자신들의 서사를 만들어가는 아가씨와 숙희, 배우 김민희와 김태리의 활약은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것이다.

영화가 끝나고 기분 좋게 극장을 나오면서 조지 밀러 감독의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가 떠올랐다. 한국에서도 이렇게 대중적인 상업영화로도 경쾌하고 명쾌하고 통쾌한 여자들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구나. 앞으로도 이렇게 경쾌하고 명쾌하고 통쾌한 영화를 더 많이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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