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주 시민기자의 영화읽기 -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

조성희 감독|2016년 개봉

 
돈 많이 들여 특수효과 빵빵 넣은 블록버스터 영화에는 좀처럼 재미를 붙이지 못하는 영화 취향을 자주 떠벌리고 다녔더니, 고상하고 조금은 난해한 예술영화 마니아로 종종 오해를 받곤 한다. 가끔은 영화가 전하는 주제의식으로 영화를 고르는, 꽤 가치지향적인 관객으로 오인받기도 한다. 영화에 관한 글을 쓸 때마다 주제를 중심으로 영화를 선택해왔으니 그런 오해를 받을 만도 하다.

그러나 솔직히 고백하자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르는 스릴러다. 퍼즐을 풀 듯 하나하나 풀어가는 긴장감이 좋다. 가장 좋아하는 영화의 색감은 느와르다. 어둡고 축축한, 황량하고 쓸쓸한 느낌이 좋다.

다만 그런 취향을 모두 만족시키는 영화를 만날 기회가 자주 없었을 뿐이다. 특히 한국 영화에서는 잘 만든 장르영화를 만나기란 쉽지 않았다. 기억을 더듬어 보자면 최동훈 감독의 ‘범죄의 재구성’이나 김지운 감독의 ‘달콤한 인생’이 어렴풋하게 떠오르지만, 장르적 재미 측면에서 아주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이마저도 벌써 10년도 더 지난 까마득한 영화들이다.

탐정 이야기라기에 앞뒤 재지 않고 일단 본 조성희 감독의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을 만난 순간 직감했다. 아, 이 영화 딱 내 취향이구나!

어둡고 축축한 골목에서 트렌치코트를 입고 중절모를 쓴 길동이 등장할 때 ‘셜록 홈즈’의 안개 자욱한 런던 거리가 떠올랐고, 먼지 피어오르는 들판에서 추격전이 벌어질 땐 어릴 적 한창 유행했던 미국의 서부극이 떠올랐다. 창고인지 폐가인지 모를 어두운 실내공간에서 격투가 벌어질 때는, 나의 극장 첫 경험이었던 홍콩 느와르가 떠오르기도 했다. 뭔가 잊고 있었던 본원적 감각의 촉수들이 죄다 살아나 꿈틀거리는 느낌이랄까.

불법 흥신소 활빈당의 두목 홍길동(이제훈)은 사건해결률 99%, 악당보다 더 악명 높은 탐정이다. 활빈당과 홍길동이라는 이름은 맞지만, 우리가 익히 아는 정의로운 영웅 홍길동과는 한참 거리가 먼 인물이다.

어릴 적 어머니를 잃은 충격으로 8세 이전의 기억을 모두 잃어버렸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누구인지도, 왜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며 잠을 이루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한마디로 자신의 근본을 모르는 사람이다.

게다가 각성제 없이는 하루도 못 살고 감정제어도 못하고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도 결여된, ‘아픈’ 사람이다. 그가 탐정 짓을 하는 것도 정의보다는 어머니를 죽인 원수 김병덕(박근형)을 찾기 위해서다.

결국 김병덕의 집을 찾았지만, 김병덕은 이미 누군가에게 납치된 후이고, 그의 손녀 동이(노정의)와 말순(김하나)만 남겨져 있다. 김병덕과 대결할 때 이용할 인질로 동이와 말순 자매를 데리고 김병덕의 뒤를 쫓던 길동은, 마을 전체를 없애버리려는 거대한 검은 조직 광은회와 마주한다.

영화의 공간적ㆍ시간적 배경은 대략 한국의 80년대로 설정은 해놓았으나 스크린에 펼쳐진 그림은 이국적이다 못해 만화에나 나올 법한 가상의 세계를 실사로 만든 느낌이다. 한국을 배경으로 이렇게 어둡고 축축한, 황량하고 쓸쓸한 느와르의 색감을 살려내다니, 일단 감동이다. 제대로 잘 살려낸 영화의 색깔은 주인공 길동의 잃어버린 기억과 광은회의 관계를 풀어가는 장르적 재미에 집중하게 만든다.

물론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에서는 길동의 잃어버린 기억 찾기, 즉 주인공의 정체성 찾기에 집중하느라 검은 조직 광은회와 제대로 맞붙었다고는 볼 수 없다. 어쩌면 이 영화는 악의 세력과 맞장 뜨는, 정의롭지만은 않은 이상한 영웅 이야기의 전사(前史)라 할 수 있다.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이 싸워야할 대상이 누구인지 알았으니 이제 본격적인 추리 스릴러를 보여주지 않을까. 처음으로 속편이 기대되는 장르영화를 만났다.

<추신> 모처럼 장르영화의 재미에 빠져 놓친 이야기가 하나 있다. 동이와 말순은 그저 주인공 길동의 인질이 아니라 또 다른 주인공이다. 특히 말순은 ‘예측 불가능한 해맑음’으로 극의 긴장감을 고조시키기도 하고 이완시키기도 하는 탁월한 조율사다. 가히 역대급 아역의 출현이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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