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평론] 발언(김종철 칼럼집)

 
압도적 현실에 주눅 들지 않고 새로운 인식의 지평을 열어주는 글을 만나기 힘들다, 식상한 논리에 기초한 비판은 감동을 주지 못한다. 한때 사표로 존경받던 이들은 일종의 문화권력이 되어 오히려 비난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읽은 만한 글이나 책이 없다는 푸념이 괜한 말이 아니다. 예외가 있다. <녹색평론>의 김종철을 가리켜 하는 말이다. 다들 정치나 경제 민주화만 떠벌일 때 그는 생태적 가치를 환기했다. 대의민주제의 실현에만 관심을 쏟을 때 그는 현실 가능한 직접민주주의를 제안했다.

두 권으로 묶여 나온 칼럼집 ‘발언’은 그동안 그가 우리 사회에 보낸 경고음으로 가득하다. 이러다가는 다 거덜 나고 말 터인데, 어찌 그리도 무심하게 사냐는 탄식으로 그득하다. 머리말에서 말했듯, 그는 “지금 우리에게 가장 절박한 과제는, 말할 것도 없이, 자연과 사회적 약자를 끊임없이 파괴하고 희생시키지 않고는 한순간도 지탱할 수 없는 이 비인간적인 시스템을 어떻게 벗어날 것이며, 그리하여 조금이라도 더 인간적이고 지속가능한 사회를 어떻게 만들어낼 것인가”를 고민한다.

최근의 칼럼을 묶은 ‘발언2’를 압축하는 열쇠말은 원자력, 민주주의 재생, 기본소득이다. 먼저 원자력 문제. 지진이 잦은 일본이 원전을 무려 54기나 세운 것은 전력 확보가 목적이 아니었단다. 언제든 핵무기를 개발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내세워 국제사회에서 발언력을 높이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의 분석대로라면, 일본은 제국주의 노선을 무리하게 걷다가 거듭해서 원자력의 저주를 받은 셈이다. 그 하나는 히로시마의 원폭 투하고, 다른 하나는 후쿠시마 원자력 사태다.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다. 막스 플랑크 연구소는 대규모 원전사고가 10년 내지 20년마다 한 번씩 터질 확률이 있다고 발표한 바 있다. 그는 “원자력 안전위원장을 반핵 혹은 탈핵 인사 중에서 임명하게 법제화해 원자력에 대한 민주적 통제를 강화하자”고 제안했다.

서방언론은 줄기차게 차베스를 독재자로 평해왔다. 하지만 그는 다른 평가를 내린다. “차베스의 관심은 철두철미 가난한 사람, 소외된 원주민, 아프리카계 주민들의 인간다운 삶의 회복에 있었다” 그가 특별히 주목한 것은 ‘공동체 평의회’라는 주민자치시스템이다. 지역주민들이 공동체 문제를 주제로 자유롭게 토론해 해결방안을 제안하고, 중앙정부에 예산을 요청하고 집행하는 주민의회였다. 그가 보기에 이 시스템은 ‘민중의 자발적 자결권이 충분히 보장되는 깊은 민주주의’를 뜻한다. 이 문제의식은 추첨민주주의 제안으로 확장된다.

기본소득은 모든 사회구성원에게 일정한 돈을 주기적으로 평생 지급하는 복지제도를 말한다. 그런데 그는 토머스 페인의 관점을 빌려 이 제도를 독특하게 해석한다. 페인은 아직 경작되지 않은 토지를 인류의 공유재산이라 여겼다. 개인의 토지소유권은 토지 자체가 아니라 경작하거나 개량한 부분에 한정된다. 그러므로 토지소유자는 기초 지대를 사회에 내놓아야 할 의무가 있는 바, 이 지대로 국민기금을 조성해 토지에 대한 자연적 상속권을 잃은 데 대한 보상으로 써야한다고 보았다.

그런데 페인은 국민기금이 국가가 주는 생활지원금이 아니라 ‘국민 각자가 응당 자신의 몫으로 지급받아야 할’ 배당금이라 주장했다. 기본소득에 대한 반론이 많다. 그런데 기본소득을 한 국가가 거둔 부에 대한 배당금이라 여기면 많은 논란을 잠재울 수 있다.

누가 보아도 우리는 지금 문명사적 대전환기 놓여 있다. 길은 끝났다. 새로운 여행을 떠나야할 때인데, 걸어야할 길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대혼란을 겪고 있다. 국가가 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지 못하고, 시민공동체는 무너지고 있다. 어찌해야 하는가? 과거의 것을 과감히 버리고 새로운 것을 상상해야한다. 그것이 불안하더라도, 그 상상의 결과가 불온하더라도 말이다. 지금 이곳을 뛰어넘으려면, 김종철의 사유를 디딤돌로 삼아도 좋다. 우리가 미처 보지 않았거나, 보이지 않는 것을 드러내주었으니 말이다. 걸어가면 길이 보이듯, 상상하면 길은 열린다.

/이권우 도서평론가

저작권자 © 인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