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이준호 건축가의 공간(空間) 이야기 ②

▲ 이준호 건축가
지난 3월 9일부터 15일까지 역사적인 대결이 열렸다. 바로 바둑 인공지능 컴퓨터인 알파고와 이세돌 간 다섯 번의 대국이었다. 5전 4승 1패로 이세돌 9단의 완패라는 결과는 충격이었다. 바둑만큼은 아직 인공지능이 인간의 지능을 넘어설 수 없다는 의견이 중론이었기 때문이다.

첫 대국을 알파고가 승리한 후, 이세돌은 적잖이 당황한 모습이었다. 두 번째 대국 역시 알파고가 승리했고, 일종의 쇼라며 장난스런 반응을 보이던 사람들도 이때부터 조금씩 진지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세 번째 대국에서조차도 알파고가 이세돌을 밀어붙이자, 전패를 예측하는 사람이 더 많아지기 시작했다. 우주에 존재하는 원소보다 더 많은 경우의 수가 나올 수 있는 바둑은 아직 인공지능이 정복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는 대전제가 무참히 깨지는 순간이었다. 알파고를 만든 구글 딥 마인드(Deep Mind)만이 이 결과를 예상하지 않았을까 한다.

인공지능의 도전

컴퓨터의 인간 사고에 대한 도전은 오래 전부터 있었다. 상대의 수를 읽고 내가 상대를 이기기 위한 ‘판단’을 내리는 작업을 수마다 해야 하는 체스나 바둑 같은 맞대결 게임이야말로 인공지능의 인간 뛰어넘기 도전에 적합한 분야였다. 체스에서 인간 뛰어넘기 도전은 꾸준하게 이어졌다.

1989년 아이비엠(IBM)의 딥 소트(Deep Thought)가 체스 세계챔피언 개리 카스파로프에게 도전했으나, 완패했다. 인간의 ‘판단’을 따라올 수 없었다. 1996년 재대결이 이뤄졌는데, 이때의 컴퓨터 역시 IBM의 딥 블루(Deep Blue)였다. 첫 경기에서 딥 블루의 승리로 세계를 놀라게 했지만, 이후 2무 3패로 카스파로프에게 무릎을 꿇었다. 1997년 개량된 딥 블루, 일명 디퍼 블루(Deeper Blue)로 다시 도전해 2승 3무 1패로 승리했고, 이후 카스파로프는 제자인 블라디미르 크람닉에게 패배해 세계챔피언 자리를 물려줬다.

2000년에는 크람닉이 스승의 복수를 위해 독일의 딥 프리츠(Deep Fritz)와 대결했지만 2승 4무 2패로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2006년에는 크람닉이 딥 프리츠에 2승 4패로 패했고, 이 시점부터 체스는 컴퓨터가 인간을 능가했다는 평가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 이후 인공지능의 도전은 퀴즈로 바뀐다. 2011년 2월에 미국의 유명한 TV 퀴즈쇼 ‘Jeopardy’에서 IBM의 슈퍼컴퓨터 왓슨과 역대 우승자 중 대단한 기록의 보유자 2명(2004~5년에 74회 연속 우승 기록 보유자와 대결 시점까지 패가 없고 누적상금만 325만 달러인 참가자)의 대결이 펼쳐졌고, 치열한 접전이 있을 거라는 예상을 뒤엎고 초반부터 잡은 승기를 놓지 않은 왓슨의 승리로 끝났다. 왓슨은 인간의 언어를 ‘이해’하고, 텍스트를 ‘분석’해 이에 적합한 자료를 찾아내고, 이를 바탕으로 한 추론으로 답을 도출하는 그야말로 ‘인간’처럼 사고하는 과정을 구현해낸 컴퓨터다.

그리고 올해 3월엔 구글 딥 마인드에서 개발한 알파고가 관심을 모았다. 앞으로 인공지능이 대체할 일자리는 어떤 것인지, 인간처럼 ‘사고’하고 ‘판단’하는 인공지능의 발달로 인간의 활동과 생활은 어떻게 바뀔 것인지, 공상과학 소설이나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가 무수히 쏟아져 나왔으나, 긍정적으로만 바라볼 수 있을지는 좀 더 지켜봐야할 듯하다.

‘이성적’ 동물인 인간의 ‘합리적’ 판단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이성적 동물’, ‘정치적 동물’로 정의했다. 인간이 가진 ‘이성’이라는 도구를 인간의 본성이자 다른 동물에게는 나타나지 않는 고유한 특성으로 바라보았고, 이는 서양 철학의 근간을 이뤘다. 바둑이나 체스 같은 특정한 규칙이 있는 분야이기는 하지만, ‘이성’에 의한 ‘합리적’ 판단은 더 이상 인간 고유의 영역이 아니다.

알파고가 무한에 가깝다는 바둑의 경우의 수를 수마다 모조리 시뮬레이션 하는 것은 아니다. 알파고의 핵심은 바로 ‘경우의 수 줄이기’다. 현재의 판에서 다음 수를 판단할 때, 수많은 기보와 인간 기사와의 대국, 이를 바탕으로 한 자신의 시뮬레이션 등으로 쌓아놓은 많은 상황 중에서 이런 수는 사람이 두지 않는다고 ‘판단’되는 경우를 제거한다. 그리고 동시에 그 다음에 자신이 둘 수를 같은 방식으로 ‘판단’해 좀 더 승리에 가까운 수를 선택한다. 즉, 최소로 나온 수를 걸러냄과 동시에 최대의 승률을 가진 수를 찾아내는 방식이다. 그것도 불과 몇 수 앞까지만 예측한다. 수마다 승리까지의 모든 경우를 시뮬레이션 하는 방식의 인공지능이라면 이번 대국에서 패는 없었을지 모르지만, 이는 엄밀히 말해서 ‘판단’을 한다고 할 수 없다.

알파고의 작동원리는 인간인 우리가 보더라도 지극히 ‘이성적’이고 게다가 ‘합리적’이기까지 하다. 인공지능이 바둑에서만큼은 인간의 지위를 얻은 셈이다.

‘젠트리피케이션’에 대한 논쟁

그렇다면, ‘이성’을 가진 인간의 판단은 어떠한가? 각종 공해로 지구의 공기가 점점 나빠진다면서도 각종 이유를 들어 나무를 어마어마하게 베어낸다. 엄청난 포획으로 참치의 씨가 곧 마를 거라며 쿼터 제한을 두면서도 자기 나라가 잡을 수 있는 할당량은 줄일 수 없다는 모순적 태도를 보인다. 지구 면적의 70%가 넘는 바다를 보호해야한다면서도 각종 오염물질과 쓰레기를 바다에 버린다.

너무 글로벌해서 감이 잘 오지 않는다면, 우리 주변으로 시선을 돌려보자. 요즘 도시에 관한 이야기에서 가장 많이 들리는 단어는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이다. 임차료가 저렴한 낡고 오래된 동네에 자본이 풍부하지 않은 예술가나 공방 등이 들어와, 동네가 새로운 분위기를 띄면서 사람들의 발길이 늘어 상권이 회복되고, 그로 인해 오르는 임차료를 감당하지 못하는 예술가나 공방 등이 쫓겨나는 현상이다. 서울 홍대가 그랬고, 상수동이 그랬고, 삼청동이 그랬다. 경리단길도 그렇게 되고 있고, 성수동은 알려지기 무섭게 변했고, 서촌도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다. 성북동도 이제 시작이라는 느낌이 든다.

이런 현상은 인간이 과연 ‘합리적’ 존재인지, 의문이 들게 한다. 건물주 입장에서는 상권이 살아나면서 더 많은 임대료를 받는 것이라, 합리적 선택을 한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이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이 아닐까? 사람의 발길이 없던 동네에 사람들이 찾아오게 한 요소가 무엇인지를 잊어버린 것은 아니지, 되물어야할 것이다.

만약 알파고가 이런 상황에 놓이면 어떤 판단을 할까? 바둑에서처럼 최종적으로 이기는 방법을 선택한다고 했을 때, 동네 분위기를 바꿔준 예술가나 공방 등을 임대료를 올려 몰아내는 것을 선택할까, 아니면 상권이 살아난 것이 예술가나 공방이 풍기는 독특한 분위기 덕분이므로 그들이 없어지면 상권도 같이 없어질 것이기에 지금처럼 두는 것을 선택할까?

젠트리피케이션에 대한 논쟁에서는 항상 이 두 논리가 첨예하게 부딪치고, 결론이 나지 않는다. ‘이성적’으로 ‘합리적’ 판단을 내리자면 후자가 답이겠으나, 건물주의 ‘이성’과 ‘합리성’은 전자를 답이라고 생각한다.
‘이성적’과 ‘합리적’이라는 판단보다 ‘이기적’이라는 본능이 더 크게 작용하는 것은 아닐 런지, 알파고에게 물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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