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현석 시민과대안연구소 연구위원
마을이 분명 끝은 아닐 거다. 동네ㆍ촌락ㆍ촌ㆍ부락 같은 말을 밀어내고 마을이란 단어가 자리를 잡은 지 시간이 꽤 흘렀다. 때가 되면 만들던 시사(市史) 등은 조금씩 마을사로 방향을 튼다. 벽화니 골목이니 하며 작은 단위의 마을 공간이 도시 담론의 주요 소재가 된 것도 오래 됐다. 멀지 않은 날에 마을을 대신할 또 다른 이야기가 등장해 자리를 잡을 거다.

장기적인 과정을 거쳤음에도 여전히 마을 사업은 활기를 띤다. 곳곳에서 마을을 가꾸려고 애쓰는 일꾼들이 있는 마당에 ‘마을 이후’의 모습을 상상하는 건 시기상조처럼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마을이 그대로 있는 건 아니다. 무엇보다 공간이 급속히 변한다. 이미 ‘동구 밖’이란 표현은 사어(死語)가 됐다. 마을 안과 밖의 경계는 흐릿하다. 경관이 사라지고 다시 새로운 경관이 탄생한다.

그나마 마을을 울타리로 묶는 기준인 공동체도 마찬가지다. 수십 년 이어오던 ‘관계’가 한순간에 흩어지고 그 속에서 다시 새로운 관계가 형성된다. 당연히 그렇게 재편된 ‘관계’는 예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인다. 세대 간 차이도 그렇다. 옛 세대가 바라보는 마을과 신세대가 바라보는 마을은 다르다. 이제 공동체란 옆집의 이웃만이 아니라 나와 선으로 연결된 다른 점들과의 연결망이다.

마을이 바뀌는 건 당연하다. 사람 사는 곳이 변하지 않으면 죽은 공간이다. 아파트 단지라고 해서 건강한 공동체적 관계망이 없으리란 법은 없다. 오히려 기존의 마을보다 더 나은 모델이 나올 수 있다.

다만, 문제는 그런 과정에서 기존의 거의 모든 존재가 사라진다는 데 있다. 집은 물론이고 거리ㆍ공터ㆍ골목ㆍ계단ㆍ우물ㆍ담장ㆍ대문ㆍ문패ㆍ가구ㆍ나무ㆍ언덕 등, 마을을 구성했던 요소들이 세상에서 없어진다. 요행히 사진으로 남는 경우도 있지만 자기 집 대문 앞에서 카메라를 들이미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더구나 지금과 같은 추세라면 마을에서 존재의 흔적을 찾는 건 기억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사라지는 마을들을 기록해 놓으려는 시도가 여러 지자체는 물론 개인 차원에서 진행된 사례가 적지 않다. 그런 성과들을 기초로 해서 마을을 더 촘촘히 더 정밀하게 기록하고 분석해서 계승할 필요가 있다. 시대별 경관과 생활을 복원하는 건 기본이고, 마을의 흔적을 찾아서 모으고, 문헌을 검증하고, 그걸 다시 논리적으로 재구성해 마을 속의 인류가 살아왔던 발자취를 연구해가야 한다. 물질적인 것만 아니라 무형의 것들도 포함해서다.

그 과정은 여러 학문의 손길을 필요로 한다. 건축학ㆍ지질학ㆍ지리학ㆍ환경학ㆍ통계학ㆍ경제학ㆍ정치학ㆍ민속학ㆍ미학 등, 학문 간 연대가 없다면 온전한 연구는 어렵다. 이런 일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발굴ㆍ조사ㆍ실측ㆍ복원ㆍ연구가 순차적으로 이어지는 방법론의 정립이 필요하다. 그걸 ‘마을고고학’이라고 이름 붙여보자. 단순히 땅을 파는 게 아니라 마을이란 공간에 고고학적 방법론을 적용하는 한편 시공간을 두터운 시각으로 파헤쳐가는 이론적 정립을 위해서다.

하지만 이런 일들은 연구자의 ‘투신’ 없인 불가능하다. 잠시 지나가며 보는 마을은 그 마을의 본모습이 아니다. 마을 속에서 사람들과 부대끼며 전봇대 하나에도 애정을 느낄 때 마을의 자취들이 비로소 정체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저작권자 © 인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