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주 시민기자의 영화읽기 - 더 랍스터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2015년 개봉

 
일찌감치 만개한 벚꽃이 후드득 눈송이 같은 꽃잎을 흩뿌린다. 미세먼지가 아무리 기승을 부려도 볼을 간질이는 바람은 어김없는 봄의 손짓이다. 작년 늦가을 개봉했으나 놓치고 지나쳤던 ‘더 랍스터’를 이제야 꾸역꾸역 찾아본 건 어쩌면, 봄날의 공기 탓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사랑하지 않으면 인간으로 살 수 없는 도시 이야기라니 어찌 보지 않을쏘냐.

짝이 없으면 추방되는 도시가 있다. 그 도시에서 추방된 이들은 45일간 호텔에 머물며 짝을 찾는다. 45일 안에 짝을 찾지 못하면 동물로 변한다. 데이비드(콜린 파렐)는 아내에게 버림받고 혼자가 돼 이 호텔에 온 중년 남자다.

그런데 이상하다. 인간으로 살기 위해 어떻게든 짝을 찾아야하는 이들이 모여 있는 곳이라면 각자 자신의 매력을 어필하며 사랑의 작대기가 오가는 로맨틱한 공간이어야 할 것 같은데, 이 호텔은 ‘반드시 짝을 만들어야한다’는 지엄한 명령 아래 엄격한 규칙과 통제만 있는, 그나마 있던 애정마저도 말라죽일 것 같은 살벌한 공간이다.

그래도 동물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사람으로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짝을 찾아야한다. 마감일이 임박한 데이비드는 자신을 속이며 비정한 여자와 커플이 되지만, 결국 거짓은 폭로되고 파국을 맞는다.

짝을 찾아야만 하는 호텔을 도망쳐 나온 데이비드가 다다른 곳은 숲이다. 짝짓기의 강요를 못 견디고 탈출해온 이들이 숨어사는 숲에서는 호텔과 반대로 어느 누구도 사랑할 수 없다. 조금이라도 애정행각을 하다가 발각되면 끔찍한 신체적 징벌이 기다리고 있다. 살벌하기는 호텔과 막상막하다.

그러나 무수한 드라마와 영화에서 이미 보아왔듯 사랑이란 장애물이 있어야 불타오르기 마련이다. 강제적인 짝짓기가 싫어 숲으로 도망쳐온 데이비드는 숲에서 한 여자를 만나고, 운명적으로 끌린다. 물론 짝짓기가 죄악인 숲에서 그의 사랑은 위기를 맞는다.

‘더 랍스터’에서 커플이라는 애착의 관계는 철저하게 통제된다. 도시는 커플이 아닌 자를 추방하고, 짝을 찾는 것이 지상명령인 호텔은 짝짓기에 성공해 도시로 돌아가거나 실패해 동물로 변하게 되는 시험장이다. 심지어 짝짓기를 거부한 반역자들이 모여 사는 숲 역시 짝을 만난 이들을 처벌하는 것으로 인간의 관계를 통제한다.

커플천국 솔로지옥인 도시와 솔로천국 커플지옥인 숲은 매우 대립적인 공간으로 보이지만, 사실 이 두 공간 모두 인간의 감정과 관계를 통제하는 시스템이라는 점에서는 같다. 사랑하지 않을 자유가 없는 도시에서는 거짓으로 사랑하는 척 연기라도 해야 인간으로 살아남을 수 있다. 사랑할 자유가 없는 숲에서는 언어를 버리고 몸짓으로 대화를 나누며 감정을 감춰야한다. 반드시 커플이 되어야 하는 호텔과 반드시 솔로여야만 하는 숲. 그 어느 곳에서도 데이비드는 행복할 수 없었다. 감정과 관계를 통제하는 시스템 아래에서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런 점에서 ‘더 랍스터’의 인물들은 참으로 체제 순응적이다. 짝이 없으면 추방이라는 도시의 명령을 그대로 따른다. 짝을 만들지 못하면 동물이 된다는 호텔의 위협 역시 순순히 따른다. 그것을 견디지 못하고 도망쳐 나온 숲에서도 마찬가지다. 사랑하면 안 된다는 시스템의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방금 전까지 옆에서 협력하던 동료에게도 잔혹한 위해를 가한다. ‘반드시 사랑해야한다’ 또는 ‘결코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시스템의 명령에 조금도 의문을 가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을 그저 영화적 상상이라 치부하기엔 뒷맛이 개운하지 않다. 영화처럼 극단적이지는 않지만,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세상 역시 그렇지 않은가. 우후죽순처럼 나오는 자기계발서와 유행처럼 번지는 명사들의 화려한 언변에 우우 떠밀려 살고 있지는 않은가. 시스템의 명령에 대한 합리적 의심조차 거세당한 채, 스스로 질문하고 생각하고 판단하는 자유를 잃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더 랍스터’는 4월의 봄날에 안성맞춤일 거라 기대했던 사랑 영화는 분명 아니다. 그러나 의심과 질문의 자유를 잃어버린 우리의 4월에는 분명 의미 있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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