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현수의 걷기여행 40. 설국, 겨울 홋카이도 이야기(상)

지난 1월 18일부터 21일까지 3박 4일간 일본 홋카이도에 다녀왔다. 방학을 이용해 여행을 다니고 있지만, 사실 마음 편하게 떠난 적은 거의 없었다. 내가 일하던 시민단체의 상근자들이 제일 마음에 걸렸다. 그런데 이번 여행 떠나던 18일, 신문에 나온 기사는 또 하필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수도권 전문대를 졸업한 정애씨는 한 공공기관 안내 데스크에서 일한다. 한 달에 130만원을 받는 파견사원이다. 2009년에 직장생활을 시작한 정애씨는 그동안 다섯 군데나 회사를 옮겼다. 방과 후 교사(월급 70만원)→백화점 카드고객센터(월급 130만원)→공공기관 고객안내(월급 120만원)→살충제 생산 공장(시급 5580원) 등을 전전했는데 모두 계약직이나 파견직이었다. 정애 씨는 “200만원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한 달에 딱 170만원만 벌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해외여행을 가보는 게 꿈이다. 아직 여권을 만들어본 적도 없다.<한겨레>(2016.1.18.)

‘한 달에 딱 170만원만 벌면 좋겠다, 해외여행을 가보는 게 꿈이다, 아직 여권을 만들어본 적도 없다’는 기사 앞에서 나는 어디로 좀 숨었으면 하는 마음을 안고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인천공항에 사람이 많을 때는 A구역에 있는 자동탑승기로 발권하고, 35ㆍ36번 창구에서 셀프백드랍을 이용해 짐을 부치면 빠르다. 단, 일본처럼 비자가 필요 없는 나라만 가능하다.

비행기 안에서 영화 ‘러브스토리’를 봤다. 1971년에 만들었으니 벌써 45년 전 영화다. 지금 보니 사랑에 관한 영화가 아니라 계급에 관한 영화였구나. 명문 부호의 아들인 올리버가 이태리 이민 가정의 가난한 제니퍼를 선택해 사회적 신분의 차이를 극복하고 결혼식을 올린다는 줄거리는 현재 같은 분위기로는 아마 ‘공상만화’에도 나오지 못할 것이다. 자신의 계급을 부정하는 올리버 같은 청년 역시 이 세상에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 예전에 사라진 종일 것이다. 계급을 부정하기는커녕 오히려 ‘금수저’에, ‘갑질’에, ‘땅콩회항’ 같은 천박한 재벌 2ㆍ3세들만 넘쳐나는 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다.

시코츠호와 키타 유자와

▲ 시코츠호와 함께 국립공원으로 지정돼있는 도야호의 일부 모습.
2시간 40분여의 비행 끝에 신치토세공항에 내리니 역시 설국답게 흰 눈이 소복이 쌓여있다. 맨 처음 코스인 시코츠호를 향해 달리는데 도로 위 또는 아래 양쪽에 처음 보는 낯선 도로 표지판이 보인다. 한국에는 물론 없고, 일본에도 홋카이도에만 있는 도로 표지판이다. 바로 도로 끝선 표시 표지판이다. 눈이 쌓여 수시로 도로가 없어지니 이 표지판이 없으면 정말로 위험천만이겠다.

낯선 도로 표지판과 눈 구경을 하면서 한 시간 정도 달려 시코츠호에 도착했다. 시코츠호는 물이 맑아 바닥까지 다 들여다보인다. 29일부터 시작하는 얼음 마쓰리(=축제)를 준비하기 위해 지금은 호수 물을 퍼다 부어 얼음을 얼리는 중이다. 약간 아쉽다.

호수 한가운데 작은 산은 후지산을 닮았다. 도야 호수와 합쳐 국립공원이다. 방문자센터에 들어가 안내문들을 살펴봤다. 4만여년 전 분화활동으로 생긴 칼데라호이며 최고 수심 363미터로 일본에서 두 번째로 깊은 호수다. 25미터 밑까지 내려다보인다. 호수 둘레는 40킬로미터가 넘는다. 겨울에도 얼지 않는 부동 호수다. 대부분의 도로는 거의 눈에 덮여있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차는 거침없이 달린다. 이미 그들에게 눈은 낯선 이방인이 아니라 늘 함께 해오던 ‘또 하나의 가족’ 같은 것이다. 두 시간 정도를 달려 키타 유자와에 도착했다.

숙소를 정하고 저녁식사를 하는데 우리나라 뷔페에서는 보지 못한, 마치 달걀판처럼 생긴 칸막이 접시가 있었다. 우리도 뷔페에서 이런 접시를 쓰면 어떨까? 그러면 좀 덜 ‘개밥’같지 않을까?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투숙객들을 위해 불꽃놀이도 하고, 빙고게임도 한다. 로비에는 자유롭게 먹을 수 있는 따뜻한 스프도 비치해 놓았다. 노력하는 모습이 보기 좋다.

식사를 마치고 온천을 하려고 남탕에 들어갔는데 깜짝 놀랐다. 할머니 한 분이 아래위로 훑어보면서 남탕을 막 돌아다닌다. 하기야 우리도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아주머니가 남자화장실에 막 들어오기는 하지만, 그래도 약간 당황스럽다. 일본은 원래 다 이런 건가?

숙소에 있는 어린이놀이터에 비닐 모형으로 신칸센을 만들어 놨다. 어린 시절부터 아이들이 철도와 가깝게 지내게 하려는 것 같았다. 화장실 세면기에 ‘음료수로 이용할 수 있습니다’라고 크게 써놓았다. 홋카이도에서는 화장실 물을 그냥 마신다. 수돗물에 대한 자신감이겠다. 바람 때문에 밑으로 내려오지 못하고 허공에서 맴도는 눈의 모습이 조명과 어우러져 마치 오로라를 보는 것 같다. 기린맥주 홋카이도 에디션 한 캔으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도야호, 쇼와신산, 노보리벳츠, 지다이무라

▲ 에도시대 건물들을 재현해놓은 시대촌의 일부 모습.
눈은 밤새 소리 없이 내려 쌓였다. 숙소 왼쪽에 교회 건물이 보인다. 예배 보는 교회가 아니고 결혼식 올리는 교회다. 언제부터, 왜, 그런 문화가 생겼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본 사람들은 대체로 결혼식은 교회에서, 장례식은 절에서 하고 싶어 한다.

아침부터 제설차량이 길을 막고 눈을 치우고 있다. 홋카이도에서 눈은 생활이다. 그냥 눈과 함께 사는 것이다. 지붕은 당연히 경사지게 짓는다. 언제나 2~3일은 집 안에 갇힐 각오가 돼있다. 그래서 집집마다 기름 탱크는 필수다. 오키나와에 물탱크가 필수인 것처럼.

30분 정도 달려 도야호에 도착했다. 시코츠호와 함께 국립공원이다. 2007년 8개국(G8) 정상 회담이 열려 유명해졌다. 둘레는 시코츠호보다 약간 넓다. 호수 중앙에 네 개의 크고 작은 섬과 산이 있다. 원래는 도야호에서 유람선을 타기로 했는데 일기 때문에 유람선이 운행하지 않는다. 사이로 전망대로 가서 호수를 조망하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홋카이도는 목축업이 발달한 곳이라, 고기ㆍ유제품 등이 유명한데 먹어보니 역시 고소하고 달콤하다. 면적은 8만 3457km²로 한국보다 조금 좁은데 인구는 560만명이다. 다양한 농작물과 유제품을 생산한다. 그래서 쇠고기ㆍ우유ㆍ치즈ㆍ아이스크림 등이 유명하다. 해산물도 마찬가지다. 생선회ㆍ초밥ㆍ대게ㆍ털게ㆍ연어ㆍ성게 알 등이 흔하다.

쇼와신산으로 갔다. 지금도 유황가스가 피어오른다. 살아있다는 뜻이다. 일본에서 가장 젊은 화산 중 하나다. 평평한 밀밭이었던 곳이 1943년 12월 지진과 함께 현재의 높이인 290미터로 솟아났다. 비록 시험만 보러 다녔지만, 그래도 2년간 방송통신대학교 일본학과에서 공부를 했다고 간판이나 게시판 글자들이 눈에 들어온다. 저 가게는 카페 레스토랑이구나. 마치 개안한 기분이다.

▲ 온천 마을인 노보리벳츠 입구에 서있는 도깨비 모형.
한 시간을 달려 노보리벳츠로 갔다. 마을 입구에서 맨 먼저 ‘환영 도깨비’가 여행자들을 맞이한다. 도깨비는 노보리벳츠의 상징이다. 이곳은 우리로 치면 수안보 쯤 되는 온천 마을이다.

지다이무라 앞에서 도리무시우동으로 점심을 먹고 시대촌 안으로 들어갔다. 지다이무라는 한자로는 시대촌, 대지 15만여평에 에도시대 건물 90여개 동을 재현해놓은 테마파크 또는 민속촌 같은 곳이다. 서민 마을, 무사 저택, 당시 생활상을 재현한 모형 등이 전시돼있다. 전통문화극장에서는 게이샤가 나오는 20분가량의 시대극도 볼 수 있는데, 전통극의 제목은 ‘오이란 쇼’다.

남자 주인공은 관객들 중에서 뽑는다. 끝나면 입장할 때 나눠준 종이에 100원 정도의 동전을 싸서 무대로 던진다. 오이란이라고 하니까, 우리 고전 소설 ‘오유란 전’과 제목이 비슷하다. 무슨 관계가 있는지 더 찾아봐야겠다. 사무라이 쇼도 나름 열심히 준비했다. 이렇게 쇼도 뭔가 일본적인 것이라야 설득력이 있다. 겨우 ‘비밥’ 정도의 상상력에 머물러있는 인천의 과제다.

시대촌에서 나와 노보리벳츠 온천 마을로 들어왔다. 노보리벳츠는 아이누어로 ‘짙은 강이 흐르는 곳’이란 뜻이다. 러일전쟁 때 부상병들의 요양지로 이용되면서 유명해졌다. 지옥계곡으로 갔다. 지옥계곡이란 지명은 큐슈의 운젠 등, 온천이 나오는 곳이면 어디든 다 있다. 길이 미끄러우니 계속 소금을 가지고 다니며 뿌린다. 고마운 일이다. 국적에 관계없이 세계의 어린이들은 모두 예쁘다.

노보리벳츠 입구에 ‘어조채공희지비’라는 위령비를 세워놓았다. 그동안 이 세상의 수많은 어류ㆍ조류ㆍ채소류가 주방장과 그의 칼에 의해 희생됐다. 주방장과 그의 칼도 그들의 잘못이 아니라 인간을 살리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래서 인간을 위해 희생한 어류ㆍ조류ㆍ채소류들을 기리기 위한 비를 세웠다. 더 이상 쓰지 못하게 된 칼들을 위해서는 ‘포정총’이라는 무덤을 만들어줬다. 재미있는 발상이다.

홋카이도의 겨울밤은 일찍 시작된다. 오후 4시 반이면 일정이 모두 끝나고, 5시 반이면 이미 깜깜한 밤이다. 물론 겨울이라 해가 더 짧기는 하지만 여기에는 사연이 있다. 홋카이도의 실제 생활과 관계없이 무조건 도쿄를 기준으로 하니 그렇게 된 것이다. 중국 우루무치도 그렇다. 밤 10시가 되어도 사방이 환하다. 베이징을 기준으로 하니 그런 것이다. 하기야 이건 남의 나라 얘기만은 아니다. 대한민국도 마찬가지, 일제강점기 훨씬 동쪽에 있는 일본과 우리나라의 시간을 무조건 같게 만들었다.

▲ 전통문화극장의 시대극 공연 장면.
저녁식사를 하고나서 마을을 산책했다. 마을이래야 300미터쯤 되는 도로가 전부다. 주로 상점과 라면 가게가 많은데, 엔마도(염마당)가 재미있다. 염라대왕 사당이다. 얼굴 표정을 하루에 5-6회씩 바꾼다. 오늘도 역시 남탕 안에 할머니가 돌아다닌다.

내가 다녀본 온천 가운데 가장 생각나는 곳이 두 군데 있는데 바로 2007년 겨울 금강산과 2006년 여름 백두산이다. 특히 백두산을 바라보며 즐겼던 노천 온천은 압권이었다. 물론 중국 쪽 백두산이었다. 난 온천 표시가 김이 올라오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인 줄 알았더니, 하루에 온천을 세 번 해야 건강해진다는 뜻이란다.

삿포로 맥주 홋카이도 에디션으로 여행 둘째 날을 마무리 했다. 삿포로 맥주는 왜 유명해졌을까. 삿포로 맥주는 매우 일찍 개발됐는데 130년이 넘었다. 북위 43도 정도의 물이 깨끗하고 맛있다고 한다. 떠다니는 빙하로 만든 유빙 맥주도 있다는데 오늘은 그냥 ‘클래식’ 홋카이도 한정판으로 만족해야겠다.(다음 호에 계속)

글ㆍ사진/ 신현수 (사)인천사람과문화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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