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주 시민기자의 영화읽기 - 바닷마을 다이어리

바닷마을 다이어리|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2015년 개봉

 
연말, 제주에 다녀왔다. 한겨울이었지만 제주는 역시 제주. 광치기해변엔 계절을 잊은 유채꽃이 노랗게 흔들리고 있었다. 제주의 바닷바람을 맞으며 루시드폴의 새 앨범을 들었다. 제주에서 농사를 지으며 만든 루시드폴 7집의 노랫말은 제주 바다와 더 없이 어울렸다.

그 중에서도 귀에 꽂힌 노래는 두 번째 트랙 ‘4월의 춤’이었다.

바다는 아무 말 없이 / 섬의 눈물을 모아 / 바위에 기대 / 몸을 흔들며 / 파도로 흐느낀다지 / 이유도 모른 채 / 죽어간 사람들은 / 4월이 오면 / 유채꽃으로 피어 / 춤을 춘다지 / 슬퍼하지 말라고 / 원망하지 말라고 / 우릴 미워했던 사람들도 / 누군가의 꽃이었을 테니 / 미워하지 말라고 / 모질어지지 말라고 / 용서받지 못할 영혼이란 없는 거라고 / 노래한다지 / 춤을 춘다지 (루시드폴 7집, ‘4월의 춤’ 가사 중)

하루가 멀다 하고 불거지는 울화통 터지는 소식들로 점철됐던 2015년 한 해. 세상 탓만 했으면 좋았으련만, 어느새 심사는 꼬이고 꼬여 분노와 미움의 화살은 내 옆의 사람들을 향했더랬다. 그래서 더욱 아프고 지쳤던 나의 2015년 끝자락에서 만난 유채꽃을 흔드는 제주의 바닷바람과 루시드폴의 노래. ‘4월의 춤’은 그렇게 나를 위로하고 다독였다.

그리고 제주에서 인천으로 돌아온 날 밤, 심야영화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바닷마을 다이어리’를 보았다. 일부러 그리 선택한 것은 아니었지만, 마치 방금 전 나를 다독이던 제주의 바닷바람이 스크린으로 고스란히 옮겨온 듯한, ‘4월의 춤’ 같은 영화였다.

한 집에 사는 세 자매 사치(아야세 하루카), 요시노(나가사와 마사미), 치카(가호)는 15년 전 소식이 끊긴 아버지의 부고를 듣는다. 친아버지의 부고지만 세 자매는 너무도 무덤덤하다. 그도 그럴 것이, 엄마가 아닌 다른 여자와 ‘눈이 맞아’ 자신들을 버린 채 15년 동안 소식도 없었던 아버지였다.

그래도 자식 된 의무감으로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한 세 자매는 그곳에서 자신들의 이복동생 스즈(히로세 스즈)를 만난다. 큰언니 사치는 둘째와 셋째에게 아버지가 죽고 혼자 남겨진 스즈를 데려와 함께 살자고 제안하고, 어찌 보면 쿨(cool)한 것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아무 생각이 없는 것 같기도 한 요시노와 치카도 별 다른 반발 없이 스즈를 받아들인다.

영화는 아버지가 떠나고 어머니마저 떠나버린 집에서 자란 세 자매의 삶에 이복동생 스즈가 들어오면서 네 자매가 하나의 가족이 되어가며 성장해가는 과정을 담는다. 영화 제목 그대로 마치 ‘다이어리’처럼 소소한 일상을 느리고 섬세하게 펼쳐낸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바닷마을 다이어리’ 이전부터 꾸준히 가족에 대한 영화를 만들어왔다. 가족이라 하면 핏줄, 하늘이 내려준 인연, 모성애와 부성애 등의 역할과 의무가 먼저 떠올라 가족주의 영화는 일단 외면해 버리는 반(反)가족주의자(?) 관객이지만,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만큼은 챙겨보곤 했다. 히로카즈 감독의 가족은 여느 가족영화와는 달랐다. 그리고 ‘바닷마을 다이어리’에서 보여주는 가족 역시 그랬다.

히로카즈 감독의 가족은 차곡차곡 쌓아가는 시간, 즉 ‘과정’이고 누군가 누구에게 일방적으로 베푸는 것이 아니라 서로 영향을 미치며 변화하는 ‘관계’이다. 또한 같은 상처를 공유하거나 혹은 같은 경험을 겪지 않았어도 깊이 공감하며 만드는 ‘연대’이다.

사치와 요시노와 치카는 함께 자랐지만,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기억과 감정이 서로 다르다. 심지어 치카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다. 스즈는 15년을 따로 살았고 어머니도 다르지만, 부모로 인해 어린 시절을 잃어버린 큰언니 사치의 아픔에 다른 두 언니보다도 더 깊이 공감한다. ‘바닷마을 다이어리’의 네 자매는 단지 가족이기 때문이 아니라 상대의 아픔과 상처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나누는 과정으로 공감의 시간을 쌓아간다. 그렇게 관계는, 가족은 만들어진다.

연말에 루시드폴의 ‘4월의 춤’을 들으며 제주의 바닷바람을 맞고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바닷마을 다이어리’를 본 것은 어쩌면 행운이었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데 이만큼 따뜻한 세리머니가 있을까. 자꾸 모질어지는 나를 다독이고 위로하며 따뜻한 마음으로 새해를 맞을 수 있는 송구영신 선물 같은 영화 한 편으로 새해 인사를 대신한다. Happy New Year!

저작권자 © 인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