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락기 강화고려역사재단 연구위원
지난 10월 15일, 50여년 만에 문학산 정상이 개방됐다. 비록 전체가 아니라 1단계 개방이라고는 해도 산 중턱을 돌아가는 등산로를 통해서밖에 볼 수 없었던 문학산 정상에 누구나 가볍게 올라갈 수 있게 된 건 작은 일이 아니다. 시민의 날에 맞춰 개방한 것도 의미를 더했다.

그로부터 2주가량 된 10월 28일에는 인천시역사자료관에서 준비한 ‘문학산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라는 주제의 학술회의가 열렸다. 고고학ㆍ역사학 측면에서 각각 살펴본 문학산과 정상 개방이후 경관의 복원과 활성화 방안에 대한 논의가 이뤄졌다.

이 자리에서 중요한 사실 몇 가지가 확인됐다. 먼저 조선 전기에 주로 인천부 관아의 남쪽에 있다 하여 남산으로 기록된 이 산이 ‘언제 무슨 이유로 문학이라 불리게 됐는지’다. 그동안은 1702년 문학산에 건립된 서원이 1708년에 학산이란 사액을 받아 학산이란 이름이 처음 생겼고, 여기에 문학산 건너편에 있던 인천향교의 문묘를 합성해 ‘문학산’이라 부르게 되됐다고 추정해왔다.

하지만 1600년대 중엽에 활동한 권시(權諰)가 문학산을 오르다라는 의미의 ‘등문학봉(登文鶴峯)’이란 제목의 시를 쓴 것이 확인돼, 학산서원에서 비롯됐을 것이라는 추정은 시간적으로 맞지 않게 됐다.

더 중요한 논의는 문학산과 인근 지역에서 나타나는 유적과 유물의 연대 문제였다. 문학경기장이 들어선 곳에서 청동기시대 유적이 확인됐고, 멀지않은 구월동 보금자리지구와 수산동 유적에서도 청동기시대 집터가 각각 43기, 11기 발견됐다. 문학산 북쪽 제2경인고속도로 아래서 진행된 발굴에서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건물지가 나오기도 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흔히 백제의 시조라는 비류와 관련한 지역으로 문학산과 문학산성을 이야기하지만, 현재까지 고고학적으로 조사한 결과로는 비류가 활동한 기원 전후의 유적이나 유물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구월동 보금자리지구에서 삼국시대 집터 10기와 무덤 14기가 발견돼 인천에 삼국시대 사람들이 살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문학산 자락에서 백제 토기가 발견된 것도 직접적인 증거다.

여기서 다시 생각해볼 것이, 비류가 문학산에 터를 잡았다는 이야기의 발생 시점이다. 이미 전부터 지적돼왔지만 문학산성을 백제 건국설화에 등장하는 비류와 맨 처음 연결시킨 것이 실학자이자 역사학자로 유명한 안정복이다. 1700년대 후반에 안정복이 ‘동사강목(東史綱目)’에서 문학산 정상에 비류 성터가 있다는 기록을 남기기 전까지는 어떤 자료에서도 문학산과 비류를 연결시켜본 예가 없다.

어찌 보면 비류가 문학산 자락에 도읍했다는 ‘인식’은 1700년대에 ‘만들어진 것’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현재까지 기원 전후의 유적ㆍ유물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해서 그 시대의 유적이 아예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도시화 과정에서 조사 없이 파괴되었을 수도, 여전히 세상에 빛을 볼 날을 기다리며 땅속에 묻혀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삼국시대 미추홀이라는 지역은 남동구ㆍ남구ㆍ연수구뿐만 아니라 경기도 시흥시 중ㆍ북부를 포함하는 너른 지역이었다. 이론적으로는 소래산 자락의 시흥시든, 바다가 가까운 소래포구 주변이든, 비류의 터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미추홀의 영역 전체에 대한 꾸준한 조사와 연구를 본격화하는 계기로 삼는 것이 진정으로 문학산 정상 개방의 의미를 되새기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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