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취재] 기지촌 출신 혼혈인의 삶과 희망 ①한국인과 캠프타운 2015 컨퍼런스

<편집자 주> 인천투데이은 한국과 인천의 형성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부평미군기지의 역사를 돌아보면서 기지촌 출신 혼혈인들의 삶과 그들의 절규를 담아내고자 기획취재를 진행한다. 이와 관련한 기사를 몇 차례 연재한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모인 아메라시안들

▲ 9월 26일(현지시각) 미국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한국인과 캠프타운 2015 컨퍼런스’에서 학생이 한국 무용을 선보이고 있다.
5000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대한민국. 대한민국 최대 명절 중 하나인 추석을 하루 앞둔 지난 9월 26일(현지시각) 미국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에 아메라시안(Amerasian) 200여명이 모였다. 아메라시안은 미국계 아시아인이란 뜻으로 펄벅재단 창립자 펄벅이 만든 명칭이다. 펄벅은 미국의 본부 외에 미군이 주둔했던 한국, 일본, 대만, 베트남 등 아시아 지역 7개국에서 혼혈인 복지 사업을 위한 재단을 만들었다. 그는 혼혈 전쟁고아를 아메라시안이라고 칭했다.

이들이 추석을 함께 즐기기 위해 샌프란시스코에 모인 것은 아니다. 미국 버클리 소재 데이비드 브라운센터에서 열린 ‘한국인과 캠프타운 2015 컨퍼런스’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 전역에서 모인 것이다. 한국전쟁 후 미국으로 입양된 혼혈 1세대에서부터 1980~90년대 입양된 혼혈 3세대까지 모였다.

한국 사회에서 혼혈인들은 크게 3세대로 나눠진다. 1세대는 기지촌 성매매가 산업화되기 이전으로 한국전쟁을 정점으로 1960년대 초반까지의 혼혈인들을 의미한다. 2세대는 1960년대 이후 태어난 혼혈인들이다.

이들은 국가의 적극적 개입으로 기지촌이 번창했던 시기에 태어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한국전쟁을 전후로 전시에 군 위안소를 설치한 이래 ‘특정 윤락 지역’을 지정했다. 기지촌을 사실상 국가가 형성해 관리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1980년대 이후에 출생한 혼혈인을 3세대로 구분한다. 2세대와 3세대의 구분은 1982년 미국의 이민법 개정에서 비롯됐다. 미국은 그해 8월 22일 아시아 지역 혼혈인에게 이민의 특혜를 부여하는 법을 만들었다.

한국인과 캠프타운 2015 컨퍼런스

‘한국인과 캠프타운 2015 컨퍼런스’는 버클리 캘리포니아대학교 한국학연구소의 협찬으로 열렸다. 이날 컨퍼런스엔 기지촌 혼혈인들 외에도 생물학적 부모 찾기를 희망하는 일반 입양인과 퇴역 미군 등도 참석했다. 인천에서 입양 간 혼혈인 등 수십 명도 함께했다.

로라넬슨(Laura Nelson) 한국학연구소 소장과 1세대 혼혈인인 주디 프레디 드레이퍼 판사가 축사를 하기도 했다. 드레이퍼 판사는 한국전쟁 시절 한국에서 태어났다. 컨퍼런스엔 그녀의 남편인 조지 드레이퍼씨도 참석해 “미국 사회에서 (주디 프레디가) 어느 나라, 어느 인종인지 묻는데, 주디 프레디는 100퍼센트 미국인이며 한국인이라고 말한다”며 “컨퍼런스를 개최해 감사하다”고 소감을 말했다.

이재홍 경기도 파주시장도 축하 영상을 통해 “저도 파주에서 자라 캠프타운에서 일하는 한국 여성의 삶을 잘 알고 있다. 그곳의 혼혈인은 우리의 이웃”이라며 “이 기회를 통해 파주시가 한국을 떠나왔던 이들의 고향이 될 수 있게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파주시는 주한미군 재배치로 반환하는 미군기지에 기지촌 여성들의 삶을 기리기 위한 공원과 함께 동상 건립을 추진 중이다.

“한국에선 기지촌 여성들에 대한 정보 찾을 수 없다”

▲ 인천시 부평구 산곡동 소재 성 빈센트 고아원 출신의 입양인들이 서재송(두 번째 줄 가운데)씨와 함께 컨퍼런스에 참석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서씨는 고아원 원장으로 1000여명의 혼혈인을 입양시켰다. 은퇴 이후에도 입양된 이들의 가족 찾기를 돕고 있다.
수지 리 게이지(Sue-Je Lee Gagem) 이타카대학 인류학과 교수는 “기지촌 미혼모의 삶은 매우 힘들었다. 그들은 교육을 받지 못했고, 경제적 고통과 인종차별, 성차별을 받으면서 살았다”고 한 뒤 “난 미국에서 주로 살았지만 인종차별, 제국주의 가난, 군대와 같은 요소를 캠프타운에서 직간접적으로 겪어왔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이어 “캠프타운에도 인종적 계급이 존재했다. 기지촌 여성들은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은 차별을 받은 존재이고, 한국 역사는 추잡함을 숨겨왔다”며 “필리핀은 아메라시안을 위한 국경일이 있지만, 한국에선 이들에 대한 정보를 미디어에서조차 찾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의 지적처럼 한국 언론은 1982년 미국의 이민법 개정에 따라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 많은 혼혈인의 삶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게이지 교수의 전공분야는 미국과 한국에서 생겨난 아메라시안으로 알려진 혼혈인의 삶과 역사적 경험을 탐구하는 것이다.

부끄럽고, 비밀스러운 잊힌 전쟁

다음 발표자로 나선 그레이스 조(Grace M. Cho)는 “미군과 결혼한 한국 여성을 ‘양공주’라 불렀고, 그들은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특권을 누리면서도 한국의 미국에 대한 복종을 상징하기도 했다”고 했다.

그녀는 한국 사회에서 미군국주의가 끼친 정신적 영향을 탐구하고 있다. 그녀가 쓴 책 ‘끊임없이 이어지는 이산가족: 부끄럽고, 비밀스러운 잊힌 전쟁’은 2010년 미국 심리학회에서 상을 받았다. 그녀는 부산에서 출생했고 어린 시절에 부모와 함께 미국으로 이주했다.

그녀는 “혼혈인들은 한국인이 아니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고, 이 아이들의 어머니는 큰 증오를 받으면서 살았다. 때론 ‘기지촌 여성들은 몸만 한국인이고, 혼은 미국인’으로 여겨졌다”며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과 미국의 과거 관계를 보여주는 상징이었던 혼혈인을 바다에 버려서라도 없애야한다는 정책을 내세웠다”고 지적했다.

오욕의 역사 지우기 위해 혼혈인 모두 보내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어바인 캠퍼스 인류학과 조교수인 엘리아나 김(Eleana Kim)은 “1세대 혼혈 입양인은 한국입양공동체에 큰 공헌을 했지만, 그들의 역사에 대해선 우리는 잘 모른다”며 “‘배틀 힘(battle Hymn)’이란 책을 보면 백인 미국 군인이 영웅으로 표현됐고, 한국의 희망을 상징하는 인물로 해석됐지만, 외국인 혐오증과 인종차별주의를 감추고 있다”고 지적했다.

‘배틀 힘’이란 책은 한국전쟁 고아 입양 관련 책이다. 그는 ‘입양된 영토: 초국적 한국 입양인들 그리고 그들과 관련된 정책들’(2010년 듀크대 출판)이란 책을 내기도 했다. 한국 출신 입양인들의 전 세계 네트워크와 한국으로의 귀향과 관련한 내용을 연구한 책이다. 그는 이 책으로 아시아연구협회로부터 ‘The James B. Palais’상을 수상했고, 아시아계미국인연구협회로부터 ‘사회과학서적’상을 받았다.

그는 “혼혈인은 미국의 식민지와도 같았던 한국의 상징이었고, 이 역사를 지우기 위해서 혼혈인을 모두 보냈다. 이로 인해 1970~80년대 입양 기록이 가장 많았다. 미국에서 이 혼혈인들을 ‘The Seed From the East(동쪽에서 온 씨앗)’라고 표현했다”며 “한 사람 당 두 명의 아이만 입양할 수 있었지만, 결국엔 여덟 명으로 늘어나게 했고, 혼혈아동은 한국이 미국의 종속국이라는 선전을 위해 공산당원에 의해 납치되기도 했지만, 한국에서도 입양이 경제발전에 기여하는 일이라고 선전하기도 했다”고 했다.

혼혈인이 어머니를 찾아볼 수 있는 제도 만들어지길

“입양인들은 어머니의 나라에서 사랑 받지 못하고, 사회 편견으로 많은 상처를 입고 한국을 떠나왔다. 나는 오늘 이 자리에서 여러분께 어머니나라의 한 사람으로서 용서를 청한다. 또한 아버지의 나라에서 부모 사랑 속에서 자랐지만, 언어와 생활 문화가 다른 데서 적응하는 데 얼마나 고생이 많았겠나? 그런 과정을 이겨내고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께 찬사를 보낸다. 마음의 상처를 훨훨 털어버리고 앞으로 용기와 희망을 가지고 행복을 찾기를 바란다”

한국에서 참석한 서재송씨의 마지막 발언이다. 그가 87세 고령에도 불구하고 이 컨퍼런스에 참석한 것은 혼혈 입양인과 그의 삶을 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인천에 있었던 ‘성 빈센트 고아원’ 원장으로 1960년대 이후로 혼혈아 1000여명을 입양 보냈다. 1997년 은퇴 후에도 입양된 혼혈인의 가족 찾기를 돕고 있다.

그는 “어떤 절차를 밟든지, 어머니를 찾아볼 수 있는 제도가 만들어지기를 기대한다”고 호소했다.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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