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평론] 우리는 시간이 아주 많아서

정다운ㆍ박두산 | 중앙북스 | 2015.5.11.

언제부턴가 가벼운 에세이를 즐겨 읽는다. 더 이상 속 끓이거나 머리 쓰고 싶지 않아서 생긴 현상 같다. 이 안에는 여행기도 상당수 포함된다. 진지한 성찰이라기보다 끼적거림에 가까운 감성, 전문 작가의 솜씨 못지않은 낯선 나라의 사진을 보면서 여행에 대한 동경을 키웠지만 한편으론 왠지 나와는 다른 이야기인 것만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던 차에 ‘우리는 시간이 아주 많아서’라는 책에서 마음을 잡아끄는 한 문장을 만났다.

“여행을 떠난 이유에 대해서는 밤새도록 이야기할 수 있다. 오랜 꿈이었다고, 아침부터 밤까지 회사에 매여 있는 하루하루가 버거웠다고, 다른 방식으로 살아보고자 했다고,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었다고. 하지만 여러 이유들은 결국 하나의 문장을 만들었다. (…) 나는 행복하고 싶었다. (…) 이 여행기는 ‘그래서 우리가 그곳에서 행복했는가’에 대한 이야기다” 5쪽

 
이 책은 한 부부가 직장을 그만두고 반년 동안 남미 대륙을 둘러본 에세이다. 내가 이 책에 매혹된 이유는 일생에 한 번 갈까 말까한 남미를 다루거나 나 또한 회사를 때려치우고 떠나고 싶다고 생각하는 30대 이야기여서만은 아니다. 웬만해선 전 세계에 사람이 가지 못하는 곳이 없고 여행의 동기와 목적은 비슷비슷하다. 이 책에는 그렇게 여행을 떠나서 우유니나 마추픽추 같은 거대하고 이색적인 풍경이 아니라 따뜻한 햇살, 시원한 바람, 돌담 위의 꽃, 맛있는 커피 한 잔에도 진심으로 행복한 마음이 묻어나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내 여행은 그렇지 못했다. 작년 겨울, 학교 선생님들과 2주간 북유럽 도서관 탐방을 떠나서 그곳에 사는 이들의 모습을 들여다본 후로 다른 형태의 삶에 대한 궁금함과 갈급함이 커졌다. 그때부터 여건 되는 대로 혼자 여러 나라를 구경했다. 여기까지 온 김에 하나라도 더 보고자 쉴 새 없이 걷고 기념품을 잔뜩 사서 호텔로 돌아와 침대에 누워있으면 ‘지금 내가 도대체 여기서 뭐하는 거지?’ 하는 생각이 속에서 강하게 치밀었다. 요컨대 하나도 즐겁지 않았다. 사실 나는 여행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남들이 하도 좋다니까 억지로 추구하는 게 아닐까?

“사실 나는 여행을 좋아하지 않아요. (…) 이런 멋진 풍경을 보는 순간에는 참 좋긴 한데요. 그런데 여행하는 일이 나를 행복하게 하지 않아요. 별로 즐겁지가않네요” 192쪽

별이 빛나는 아름다운 우유니 사막에서 일출을 기다리며 이야기를 나누다 상대방이 이처럼 불쑥 던진 고백에 저자는 배낭을 메고 낯선 땅을 걷는 사람들이 모두 여행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일 수 있겠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또 짐을 꾸릴 채비를 앞두고 있다. 영어 한마디도 제대로 못하고, 비행에 극심한 공포를 느끼면서도 왜 나는 여행을 계속 하려하나. 오랫동안 책을 읽고 글을 써온 나는 나를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일을 하면 할수록 내가 어떤 사람인 지 알 수 없게 됐다. 그러나 일을 하지 않을 순 없다.

여행도 마찬가지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땅에서 얘기를 나눌 이도 없이 오롯이 나 스스로 느끼는 감각, 감정에 맞닥뜨리면서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발견하는 중이라고 믿는다. 지금 당장은 내가 이런 사람이었나 싶어 혼란스럽지만 여행을 하다보면 내 스타일이 자리 잡히고 내가 사는 모습도 점차 정돈되지 않을까. 세상 끝이라 불리는 비글 해협에 도착해서도 투어를 하지 않고 자신을 만나기 위해 카페에 앉아 진한 커피와 빵을 먹으며 일기를 썼다는 저자처럼 말이다.

책에 적힌 블로그 주소에 들어가 봤다. 남미에서 돌아온 이후 1년간 제주도에 머무르고 지금은 바르셀로나에 2년 정도 살러 간 듯하다. 나는 그들이 걱정이 없거나 돈이 많아서 쉽게 떠난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머나먼 이국까지 왔으니 더욱 즐기며 살아야지’ 결심해도 하루 종일 만화책이나 게임 경기를 보고 고민하는 등, 지금 여기에서 애쓰고 번민하며 살아가는 우리네 일상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그곳에서도 그럴 수 있다는 점이 왠지 모를 안도감을 준다.

여행을 가서 내가 느끼는 것이 잘못된 것만은 아니다. 답답한 행동이나 실수도 한다. 피곤하고 별 인상이 없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좋아할 수 있고 계속 해볼 수 있다. 나는 이 책을 보며 내 여행을 점검하고 힘을 냈다. /이찬미 청천도서관 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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