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람] 책읽어주는 할머니 유정재씨

불이 꺼지고 빛 그림자를 이용한 그림에 불이 들어오자, 아이들의 얼굴은 호기심이 가득했다. 이어 할머니들의 구수한 음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우리 인천에는 아름다운 섬이 많아. 몇 개나 있을까? 인천에는 섬이 154개나 있어. 오늘은 그 많은 섬 중에 ‘영흥도’라는 섬에 있었던 옛날이야기를 들려줄게”

‘용마정의 물맛’이라는 제목의 이야기이다. 옛날 영흥도에 우물가가 있었는데 하늘에서 우물가로 내려온 용마를 욕심 많은 박씨가 잡은 걸 동네 주민이 살려줘 용마가 좋은 우물물을 선물로 내려줬다는 얘기다.

지난 8일 오전 10시, 연수구에 있는 한 어린이집. 할머니들이 ‘미추홀 옛이야기를 들려주자’라는 제목으로 아이들에게 옛이야기를 해주고 있었다. 그 중에 한 명인 유정재(61ㆍ사진)씨를 프로그램이 모두 끝나고 만났다. 5세부터 7세까지의 어린이들에게 20분씩 한 시간이나 옛이야기를 연이어 들려주느라 피곤할 법도 한데 유씨는 온화한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내 이름은 아프리카, 책읽어주기 자원활동가

▲ 책읽어주는 할머니 유정재씨.
“아이들한테 통하는 이름은 아프리카예요. 이 예명을 들려주면 ‘선생님 이름은 왜 아프리카예요’라고 묻죠. ‘너희가 아프리카가 궁금하면 선생님이 아는 만큼 다 얘기해주려고 그래’라고 답해요”

올해로 환갑인 유씨는 1990년대 초반 5년 동안 아프리카 이디오피아에서 살았다. 사업을 하는 남편을 따라 온 가족이 이민을 간 것이다. 그때의 경험을 아이들에게 들려주고자 예명을 그렇게 정했고, 기회가 될 때마다 그곳의 얘기를 쉽고 생생하게 전달하고자 애썼다.

유씨는 재작년 연수구에서 진행한 ‘책읽어주기 자원활동가 양성과정’에 참가했다. 교육을 수료한 이들은 연수지역에 있는 어린이도서관에 배치돼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줬다. 유씨를 포함한 자원활동가 8명은 짱뚱이어린이도서관과 인연을 맺고 ‘개구리네 한솥밥’이란 이름으로 일주일에 한 번씩 아이들을 만났다. 그 후 자원활동가 4명이 ‘사자 어금니’라는 이름으로 합류해 모두 열두 명이 작년까지 짱뚱이어린이도서관에서 책읽어주기 자원활동가로 활동했다.

지난해 말, 짱뚱이어린이도서관이 이 열두 명과 함께 ‘미추홀 옛이야기를 들려주자’라는 사업으로 인천문화재단에 계획서를 제출했다. 그것이 채택됐고, 올해 초에는 인천지역의 옛이야기가 실린 책을 읽고, 서정오 어린이문학가의 특강을 듣는 등, 아이들을 만나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했다.

“그냥 얘기만을 전달하는 것보다 시각적인 효과를 주면 아이들한테 더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았죠. 누군가 빛 그림자를 활용해보자는 제안을 했는데, 좋더라고요”

옛이야기를 들려주기만 하는 것보다 훨씬 효과가 있었다. 일단 방안의 불을 끄니 아이들은 불빛으로 시선을 집중했고, 게다가 빛으로 그림을 보면서 이야기를 들으니 생동감이 있었다.

서른 번의 만남, 연령별로 반응도 다양해

책읽어주기 자원활동가 12명은 3인 1조 또는 4인 1조로 아이들과 옛이야기를 나누러 다닌다. 상ㆍ하반기 30회씩 프로그램이 예정돼있다.

“연수구 관내에 있는 어린이집에 이 프로그램을 알리는 공문을 보냈어요. 접수된 순서대로 어린이집을 찾아가고 있는데 상반기는 오늘이 끝이고, 9월부터 하반기 프로그램을 진행할 예정입니다. 주로 6~7세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데, 5세까지 요청하는 어린이집이 있기도 하죠”

아이들에게 한 살은 천양지차다. 7세는 학교 갈 나이여서인지 의젓하고 이야기를 쏙쏙 받아들여 더 대견하다고 했다.

“4세와 5세는 너무 활동적이어서 통제가 안 되고, 정신없이 돌아다니느라 집중을 못해요. 오히려 2~3세는 두 다리 쭉 뻗고 앉아서 잘 들어 참 예쁘죠. 6~7세는 확실히 의젓해서 좋아요”

활동적인 4~5세도 물론 예쁘다는 유씨는 이야기가 끝나고 나면 가끔 꽉 안기는 아이들이 있다고 했다. 품에 안겨 떨어질 줄 모르는 아이들이 있는데, 그 아이들한테서 애정결핍이 느껴져 콧등이 시큰하기도 했단다.

“갈 때마다 몇 번을 그러는 아이가 있어요. 사랑이 진짜 그리운 친구 같았죠. 내 손자손녀들도 어린이집에 갈 텐데 그 애들은 어떨까 싶기도 합니다”

손자손녀들과 친하기 위해 시작한 일, 이제는 모두 친구

▲ 책읽어주기 자원활동가들이 지난 8일 연수구에 있는 한 어린이집 아이들에게 옛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2000년까지 남편과 함께 건축자재 판매업을 한 유씨는 아픈 시부모님을 모시게 되면서 일을 그만뒀다. 이후 시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시고 의미있는 일을 모색하다 이 일을 만나게 됐다.

“슬하에 1남 1녀가 있는데 모두 결혼해서 자식들을 낳았죠. 손자손녀들이 가끔 우리 집에 오는데 낮을 가리더라고요. ‘어떻게 친해질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가 책을 읽어주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그것도 밋밋한 게 아니라 뭔가 재밌는 기술이 필요하겠다고 생각해 동화구연지도사자격증과 손유희지도사자격증을 땄습니다. 이제는 손자손녀들이 우리 집에만 오면 책 읽어달라고 난리예요. 활동하는 데 자부심도 있고 정말 좋습니다”

그 후 연수구자원봉사센터가 운영하는 ‘보이스 북(book voice=목소리로 책을 읽어주는 것 )’ 활동도 했고, 지역아동센터 아이들한테 책을 읽어주는 일도 했다. 그러다 연수구에서 하는 책읽어주기 자원활동가 양성과정에 참여해 지금에 이르렀다.

유씨의 활동은 이게 끝이 아니다. 현재 문화체육관광부에서 하고 있는 ‘아름다운 이야기 할머니’ 교육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 옛이야기를 외워서 아이들을 가까이 앉혀 눈을 바라보고 얘기를 나누는 것이다. 이른바 ‘무릎교육’이라고도 하는데 아이들을 무릎에 앉힐 만큼 가까이 앉아 교감하며 얘기를 나눈다는 취지다.

자원활동가로 봉사하면서 사는 삶

프로그램을 진행하면 교통비와 점심 값 정도가 나오는데, 자원봉사 개념으로 이 일을 한다는 유씨는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 계속할 생각이라고 했다.

“남편도 제 활동을 적극 지원해줘요. 우리 나이에 이런 게 제일 좋죠. 집에만 있는 친구들한테도 적극 권하고 있어요. 아직도 하고 싶은 게 많아요. 할 수 있는 한 아이들한테 책을 읽어주고 틈틈이 자원봉사활동도 하고 싶습니다”

재작년 인천실내무도아시아경기대회와 지난해 인천아시아경기대회 때 통역 자원봉사단으로 활동한 유씨는 올해 10월에 송도에서 열리는 ‘2015 프레지던츠컵 세계 골프대회’에서도 통역 봉사를 할 계획이다. 이를 위해 영어를 배우러 다니기도 한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유씨를 보고 있자니 긍정적인 에너지가 전해져 의미 있는 뭔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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