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지역으로 출장 갔다 돌아온 남편이 검은 비닐봉지를 내민다. 별 생각 없이 받아 들다가 어깨가 빠지는 줄 알았다. ‘뭐가 이렇게 무거워?’ 하며 봉지를 열어보니, 맞다. 남편이 올라오는 길에 대전에 들를 거라 했지! 대전엔 남편의 오랜 친구가 산다. 아버지가 키운 소를 도소매하고 있다. 그래서 남편이 친구를 만나고 올 때면 늘 먹기 좋게 썰어 진공 포장한 한우를 잔뜩 가져오곤 했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웬일인지, 자르지도 않은 고기가 진공 팩 하나에 꽉꽉 눌려 담겨 있었다. 무게도 무려 6kg이나 됐다. 팩을 뜯으니 시뻘건 고깃덩어리가 핏물과 함께 도마 위로 주르르 쏟아진다. 순간, 소고기가 아닌 죽은 소 한 마리가 가죽이 벗겨진 채 내 앞에 쓰러져 있는 것 같았다. 소름이 돋았다. 지금 이 고기를 손질하기는 쉽지 않겠다 싶어, 비닐에 그대로 담아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 소 우(牛)의 금문(위)과 갑골문.
소를 뜻하는 한자 소 우(牛)는 소의 얼굴을 나타낸 것이다. 금문 중에는 소의 얼굴을 그대로 그려놓은 것이 있다.(그림) 이것이 뿔을 강조한 지금의 한자로 변했다. 소를 처음 그린 이는 과연 누굴까? 소를 왜 그렸을까.

글자도 기록도 없던 아주 먼 옛날, 사냥을 나갔다 빈손으로 돌아온 누군가가 있었다. 다 잡았다가 놓친 소를 생각하면 안타깝기 그지없다. 내일은 잡을 수 있을까? 눈앞에 아른거리는 소를 땅 위에 더듬더듬 그려보았다. 주위에 사람들이 모여든다. 누군가 큰 소리로 외친다. “이건 소다! 들판의 소를 여기로 데려 오다니! 놀랍다” 누군가는 놀라 도망치고 누군가는 환호했다.

다음 날 아침, 어제 잡았던 소가 사라졌다. 밤새 내린 비에 소가 씻겨 나갔다. 진짜 소를 잃은 것처럼 아쉬워하는 이들을 위로라도 하듯, 이번엔 동굴 벽에 소를 그렸다. 비가와도, 바람이 불어도 문제없다. 소의 영혼을 동굴에 가뒀으니 이제 몸만 데려오면 된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그날도 사냥에 실패했다. 아무래도 소를 살려둔 게 문제다. 소를 잡아야겠다. 벽에 그린 소에 창을 던졌다. 저 소를 창으로 죽였으니, 내일 사냥엔 소를 꼭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추측이다. 하지만 억지는 아니다. 유명한 미술사학자인 에른스트 곰브리치가 쓴 ‘서양미술사’에는 이런 일화가 나온다. ‘한 유럽 화가가 아프리카의 마을에서 소를 그렸더니 원주민들은 실망해서 “당신이 그 소들을 끌고 가버리면 우리는 무엇으로 살아갑니까?”라고 항의했다고 한다. 이런 기괴한 생각들은 (중략) 현재까지 잔존해 내려오는 가장 오래된 그림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40쪽)

대전에서 온 소고기는, 알고 보니 직원이 잘못 꺼내 준 것이라 했다. 덕분에, 나는 오늘까지도 냉장고에 있는 소, 아니 소고기 생각에 마음이 무겁다. 저 소는 어떻게 살다가 죽어 우리 집 냉장고까지 오게 됐을까, 생각하면 슬프기까지 하다. 그동안 너무 쉽게 소며 돼지며 닭을 먹었단 생각도 한다. 시간이 지나면 달라질까? 지금 같아선, 앞으로 소고기를 영영 못 먹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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