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冊)의 금문
내겐 스탬프라 부르는 도장을 지우개로 만드는 취미가 있다. 별난 취미 덕분에 지난주 좋은 일을 했다. 지인이 십장생이 그려진 스탬프가 급하게 필요한데 혹시 만들어줄 수 있느냐고 부탁해온 것이다. 서울 청계광장에서 열리는 ‘세계 책의 날’(4월 23일) 기념행사 때 사용할 것이라고 했다.

나는 ‘그런 날’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그러고 보니, 그날은 인천과도 관련이 깊은 날이다. 바로 이날, 인천은 1년 기한의 ‘세계 책의 수도’가 됐으니 말이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것이다.

책을 뜻하는 한자는 책(冊)이다. 우리말 뜻과 한자의 음이 같다. 글자를 잘 살펴보면 무언가 세로로 된 것을 줄로 꿴 모양이다. 종이가 없던 시절, 이를 대신한 것은 대나무였다. 아무 곳에서나 금방 자라는 데다 다른 나무에 비해 손질하기도 수월했기 때문이다. 대나무에 글자를 쓰려면 몇 단계 작업을 거쳐야한다.

먼저 대나무의 마디를 자르고 매끈하게 곧은 부분을 세로로 쪼갠다. 그 다음 불에 쬐여 기름을 빼고 바짝 말리면 글씨를 쓰기 좋은 모양이 된다. 너비가 글자 하나를 겨우 쓸 만한해서 글자는 세로로 써나갔다. 이것을 가죽이나 비단 끈으로 이어 붙여 넓게 만들었다. 이것이 죽간이다. 죽간은 대나무를 뜻하는 죽(竹)자와 이동이 가능한 문서를 뜻하는 간(簡)을 합한 말이다. 죽간을 차곡차곡 겹쳐 다시 끈으로 묶은 것이 바로 책(冊)이다.

중국 최고의 시인으로 꼽히는 두보는 ‘남자는 모름지기 다섯 수레의 책을 읽어야한다’(男兒須讀五車書 남아수독오거서)는 시구를 남겼다. 남자 운운하는 것이 조금 비위가 상하긴 하지만, 당시 시대상을 감안해 넘어가기로 한다. 다섯 수레의 책이라 하면 평생 읽어도 다 못 읽을 만큼 양이 엄청날 것 같다. 정말 그럴까?

당시 책은 대나무로 만들어졌음을 기억해야 한다. 글 몇 줄이면 죽간 한 장이 가득 차버리니 요즘 같은 책 한 권 만들기 위해선 죽간 수천 장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니 다섯 수레라 해봐야 요새 책으로 200권을 넘지 않을 거라 추측한다.

그렇다고 책 200권이 적다는 것은 아니다. 어디 마음만 먹는다고 책을 쉽게 읽을 수 있던가?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지만, 평소 책읽기를 즐기는 나도 지난해 고작 10권을 읽었을 뿐이다. 그것도 4월 이전에 읽은 것이 대부분이다. 이유가 있다. 건강 문제와 어지러운 세상사가 겹쳐 몸과 마음이 시끄럽고 부산했다.

책 읽을 여건도 썩 좋지 않다. 집에서 가장 가까운 도서관에 가려면 버스를 두 번이나 갈아타야하고, 도서관 자료실은 독서실 같은 열람실에 밀려 몇 층이나 올라가 있다. 새로 지은 공공도서관에 열람실을 따로 만들지 않는 것이 대단히 문제 있는 것처럼 여기기도 한다. 도서관에 자료실보다 열람실이 많은 것이 더 이상한 일 아닌가?

이런 와중에 인천이 책의 수도가 됐다. 우선은 반갑다. 늘 먼발치에서 주변을 맴돌던 책과 책 읽는 문화, 이로부터 만들어지는 인문학적 분위기를 내 삶 가까이 끌어당기는 계기가 되리란 기대 때문이다.

한편으론 으레 관이 주도하는 행사의 형식적 모습이 빤히 그려지기도 한다. 보여주기 위한 행사 위주로, 그것도 자기들끼리 생색만 내고 그치지는 않을지 걱정이다. 다섯 수레의 책에서 삶의 보물을 캐내라는 옛 사람의 말뜻을, 제대로 실현할 수 있는 환경을 먼저 마련했으면 한다. 부디 1년 동안 우리에게 주어진 ‘세계 책의 수도’라는 명칭이 값지게 쓰이길. 많은 시민 사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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