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공간] 시 쓰는 ‘시시(詩詩)한 동아리’

비가 오려는지 오전 내내 하늘이 어둡더니 한두 방울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지난 13일, 서구 연희동에 있는 인천여성회 서구지부 부설 풀뿌리미디어도서관을 찾아갔다. 시를 쓰는 엄마들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나서다. 도서관 안에는 밖의 날씨와 다르게 밝은 기운이 느껴졌다.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과 ‘유진과 유진’

▲ ‘시시한 동아리’ 회원들이 인천여성회 서구지부 부설 풀뿌리미디어도서관에서 모임을 하고 있다.
이날은 두 모둠으로 나눠 책을 읽고 난 소감을 나눈 후 글을 쓰는 시간을 가졌다. 작가 미치 앨봄이 쓴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을 읽고 돌아가면서 한마디씩 나눴다.

“죽음을 앞두고 겁은 나겠지만 아무 준비 없이 죽는 사람보다는 그래도 자기 인생을 돌아볼 수 있는 모리는 행복할 거 같아요. 저도 이런 순간이 주어진다면 내 인생을 돌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읽었어요”

“저는 책에 있는 구절이 좋아서 옮겨 써봤어요. ‘어떻게 죽어야 좋을지 배우게,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배우게 되니까’라고 모리 교수가 제자들에게 한 말인데요. 정말 그런 것 같아요”

이 책은 작가의 실제 경험담을 다룬 책이다. 작가는 루게릭병을 앓으며 죽음을 앞두고 있는 대학 시절의 은사인 모리 교수를 매주 화요일 찾아간다. 교수는 삶과 죽음, 사랑, 가족 등, 바쁜 일상에서 놓치고 있는 중요한 것들에 대해 얘기한다. 얘기가 끝나자, 자신의 죽음을 떠올리며 유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다른 모둠은 이금이 작가의 ‘유진과 유진(푸른책들. 2004)’을 가지고 이야기를 나눴다. 이 책에는 같은 이름의 ‘유진’이 두 명 나온다. 유치원을 다닐 때 원장으로부터 똑같이 성추행을 당한 큰 유진과 작은 유진은 중학교 2학년 때 같은 반이 된다. 큰 유진과 달리 작은 유진은 같은 유치원을 다닌 적이 없다고 말한다. 소설은 성추행을 당했을 때 부모가 어떻게 대처하는가에 따라 엄청나게 다른 삶을 살아간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가 자랄 때도 이런 일은 누구나 한 번씩 겪잖아요. 작은 유진 엄마는 자신의 경험이 떠올라 수치심으로 아이의 기억을 감췄던 게 아닌가, 생각해요”

한 회원의 말에 다른 이들은 공감의 뜻으로 머리를 끄덕였다. 이들은 소설의 주인공에게 편지를 쓴 후 돌아가며 읽었다. 두 유진 엄마한테 쓴 사람도 있고, 자기 딸에게 쓴 이, 유진이에게 쓴 이, 다양했지만 역시 눈물이 섞인 목소리는 낭독을 몇 차례 멈추게 했고, 끝까지 읽을 자신이 없다는 회원은 다른 이에게 낭독을 부탁하기도 했다.

밝은 기운의 공기가 조금 무거워졌지만 오히려 더 따뜻해졌다. 치유가 이런 게 아닐까.

시시(詩詩)한 동아리, 시를 쓰는 동아리

매주 월요일 오전 10시 30분에 시작하는 이 모임은 정오 무렵 끝난다. 강윤희(40) 사무국장에게 동아리 소개를 부탁했다.

“지난해 6월에 만들었어요. 도서관이나 문화센터에서 인문학 강좌를 하는데 시나 글을 직접 쓰는 프로그램은 없더라고요. 대부분 작가의 경험을 듣는 강좌나 기술적인 걸 배우는 게 주를 이뤄요. 내 안의 생각이나 마음을 끄집어내 풀어내는 것이 아닌 무언가 채우려고만 하는 거 같아요. 자기를 표현하기 가장 쉬운 게 글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길게 쓰면 힘들 텐데 우리처럼 생활하면서 겪은 일들을 한 줄이라도 쓴다면 누구나 시작할 수 있죠”

그래서 강 사무국장은 ‘시시한 동아리’가 추구하는 시는 쉬운 ‘생활시’라고 강조한다. 작년에는 인천시 사회단체보조금 지원 사업으로 선정돼 지원금을 받았고, 올해는 인천문화재단에서 지원금을 받아 외부강사를 초청하기도 하고 워크숍처럼 역량을 강화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시시한 동아리’는 모임을 주도적으로 이끄는 대표와 사무국장의 이력만으로도 결코 시시하지 않았다.

풀뿌리미디어도서관 관장이자 동아리 대표인 안정옥(46)씨는 인천노동자문학회 사무국장을 지냈고, 지금도 꾸준히 시를 써 지면이나 인터넷에 발표하고 있다. 강 사무국장은 어릴 때부터 소설가를 꿈꿨지만 ‘밥 빌어먹는 직업’이라는 부모의 반대로 일찌감치 포기했다. 그러나 책이 좋아 이곳 도서관에서 사무국장으로 일하며 책을 손에서 놓지 않는다고 한다. 사색의향기문화원에서 운영하는 향기서평단에서 3년간 활동하기도 했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나만의 책을 만들다

▲ 시를 쓰는 ‘시시한 동아리’ 회원들.
회원들은 작년에는 주로 시집을 읽었다. 안정옥 대표가 시 쓰는 방법을 안내하기도 하고, 군산에 있는 ‘채만식 문학관’ 여행과 강화도 나들이를 하며 색다른 곳에서 시를 쓰기도 했다. 작년 말에는 도서관 송년회에서 시화전과 시낭송회를 하기도 했다.

“올해는 ‘데일리 드로잉(Daily Drawing)’을 배워 매번 앞풀이로 내 삶을 그려보려고해요. 책 읽고 다른 사람들과 느낌을 나누는 시간과 생활시를 써와 낭독하고 합평하는 시간을 만들려합니다”

그밖에 찾아가는 시낭송회도 할 계획인데, 노인복지회관이나 어린이집을 찾아가 대상에 맞는 시를 읽으며 다양한 삶을 공감하려는 준비도 하고 있다. 올해도 역시 문학기행과 워크숍이 계획돼있고, 연말에는 각자 쓴 글을 묶어 책을 만들 계획이다. 그래서 각자 공책을 가지고 있다. 낱장으로 쓰고 없애는 것이 아니라 쓴 글을 차곡차곡 모은다. 연말에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나만의 책’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나를 비추는 거울이자 나와의 약속

“글쓰기는 자기를 반추할 수 있는 가장 쉬운 거울이 아닐까, 생각해요. 화려하게 잘 쓰는 것도 좋겠지만 자기 생각이나 마음을 정리할 때 쓰는 거 같아요. 내 삶의 윤활유죠”

강 사무국장은 ‘살아가면서 나를 정리한다는 건 다른 사람과 공감을 시도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글을 쓰고 읽는 과정을 오래 하다보면 타인을 이해하고 인정하게 된다고 한다.

“글을 쓰다보면 내 생각과 마음이 묻어나니까 함부로 못살겠더라고요. 이렇게 쓰고 행동은 다르게 하면 사기꾼이잖아요. 그래서 약속을 지키게 되죠. 젊었을 때는 혼자 읽고 혼자 쓰는 게 좋았는데 지금은 나누는 기쁨을 알았어요. 같은 책을 읽고 나누기를 해도 사람마다 꽂히는 부분이 다르잖아요. 혼자 읽으면 자기만의 세계에 빠지는데 여럿이 얘기를 나누니까 귀가 커진다고 해야 할까요. 저 사람의 얘기도 맞다는 걸 깨닫고, 제가 미처 경험하지 못하거나 생각하지 못한 것을 손쉽게 얻을 수도 있고요. 얘기를 나누면서 좋은 관계로 이어지기도 하니까 ‘일타삼피’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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