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주 시민기자의 영화읽기 - 스물

스물 | 이병헌 감독 | 2015년 개봉

 
‘스무 살 모든 것을 걸어라’, ‘스무 살에 배웠더라면 변했을 것들’, ‘스무 살 절대 지지 않기를’, ‘스무 살 희망의 세상을 만나다’, ‘스무 살 이제 직업을 생각할 나이’…. ‘스무 살’을 키워드로 검색했을 때 나온 책의 제목만 봐도 알 수 있다. 스무 살은 스무 살이라는 이유만으로 무엇이든 도전할 수 있고 바꿀 수 있으며, 그 도전은 인생 전체를 변화시킬 만큼 결정적인 과정이라 생각한다.

이런 통념 위에서 스무 살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고, 뜻하는 것은 무엇이든 이룰 수 있는’ 마법의 나이가 된다. 그 시절 겪는 고통과 갈등은 지나고 나면 모두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속담 그대로 ‘좋은 경험’으로 치부될 뿐이다. 지난해 세대 간 갈등의 원흉이라도 된 것처럼 논란이 뜨거웠던 김난도의 ‘아프니까 청춘이다’ 역시 스무 살, 청춘에 대한 기성세대의 굳건한 통념의 방증일 뿐이다.

그러나 스무 살들은, 그리고 스무 살을 거쳐본 이들은 안다. ‘아 대한민국’의 노래 가사가 5공화국의 독재를 가리기 위한 허위광고였듯, 청춘에 대한 장밋빛 언설 역시 단지 통념이자 판타지일 뿐이란 것을. 그래서 또 다른 기성세대는 ‘88만원세대’라는 이름으로 20대를 부르며 그들이 처해 있는 척박한 현실을 개탄한다.

예찬이든 개탄이든 스무 살로 상징되는 청춘에 대한 언설은 시대를 불문하고 넘쳐났지만, 지금 대한민국만큼 20대에 대한 담론이 논쟁적이고 심각했던 적이 있나 싶다. 논쟁이 붙었다 하면 세대 간 갈등이 되고, 계급투쟁도 된다. 2015년 대한민국에서 ‘청춘’은 심각한 논쟁과 갈등의 대표 주제다.

그런데 이런 심각한 논쟁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듯, 심지어 뇌 자체가 없어 아예 생각이란 게 없어 보이는 세 명의 스무 살이 있다. 이병헌 감독의 두 번째 장편영화 ‘스물’의 주인공 치수(김우빈)와, 동우(이준호), 경재(강하늘)가 바로 그들이다. 꿈도 목표도 없이 오로지 잘난 외모를 무기로 여자 꼬시기에 여념이 없는, 스스로 잉여 백수가 된 치수, 집안이 망해 학원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숱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만화가의 꿈을 잃지 않는 재수생 동우, 셋 중 가장 말짱한 모범생이지만 술만 마시면 개가 되는 경재.

고등학생 때부터 늘 붙어 다니며 볼 꼴 못 볼 꼴 다 본 죽마고우인 셋은 성인으로서 첫 발을 내딛은 스무 살, 각자의 포부대로 꿈과 이상을 향해 몸을 내던지지만, 세상은 그들을 비웃듯 차갑게 내동댕이친다. 자신감 넘치게 스스로 백수의 길을 택했지만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지 몰라 답답한 치호, 만화가를 향한 간절한 꿈만으로는 도저히 꿈 근처에도 다가갈 수 없는 궁핍한 현실에 매번 무릎이 꺾이는 동우, 대기업 사원으로 가는 정식 코스를 차근차근 밟겠다던 다짐이 짝사랑의 열병으로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진 경재.

이들은 어쩌면, 스무 살에 대한 통념 바깥의 ‘찌질함’을 도식화했을 때 나올 수 있는 가장 전형적인 캐릭터다. 전작 ‘병헌씨 힘내세요’로 찌질하기만 한 영화감독 지망생의 고단한 현실을 가벼운 웃음으로 보여준 이병헌 감독은 ‘스물’의 찌질한 세 청춘이 직면한 현실 또한 버라이어티 개그 쇼로 승화시킨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개그 쇼 사이사이에 진지한 드라마와 사회적 메시지가 나올 것 같은 분위기도 가끔 등장하지만, 감독은 오로지 웃기기만 하겠다고 작정한 듯 단번에 슬랩스틱 코미디로 분위기를 바꿔버리고 웃음으로 꿋꿋하게 밀어붙인다.

그래서 좋았다. 스무 살 청춘을 두고 오로지 심각하기만 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2015년 대한민국 한복판에서 이렇게 한판 웃으며 스무 살을 이야기할 수 있어서. 좀 가벼우면 어떤가. ‘아프니까 청춘이다’보다 ‘88만원세대’보다, 덜 떨어진 바보들의 몸 개그가 주는 웃음 뒤의 짠함이 내 스무 살에게, 내 스무 살 친구들에게 힘이 되는 걸. 찌질한 나에게는 그 어떤 논리보다 찌질한 웃음이 최고의 위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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