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현수의 걷기여행 37 - 제주에서 4박 5일(중편)

▲ 용눈이 오름.
용눈이오름과 우도

제주여행 둘째 날인 1월 23일. 전날에 비해 날씨가 따뜻했다. 용눈이오름으로 갔다. 용이 누운 모습이라 용눈이라 한다. 김영갑 선생이 제주에서 가장 선이 아름다운 오름으로 꼽았던 곳. 김영갑 선생이 루게릭병으로 손가락이 마비되면서도 하루에 몇 번이나 오르내리며 카메라 셔터를 눌렀던 곳, 용눈이오름. 그는 내 또래인데 죽음으로 이미 전설이 됐다. 자기 일에, 하나밖에 없는 자신의 목숨을 걸었던 사람. 그래서 꼭 한번 와보고 싶었던 곳이었다. 용눈이오름은 봉우리 세 개로 이루어진 곳인데, 어머니의 가슴 같은 오름의 선이 기가 막혔다. 역시 김영갑 선생이 목숨을 걸만한 곳이라는 생각을 했다.

오름은 산보다는 낮은 곳을 말하는 제주어다. 제주에 360여개가 있다. 나는 한라산의 높이는 한국전쟁이 일어난 해로 외우고, 오름의 숫자는 1년 365일로 외운다. 오름은 계절에 따라, 하루 중에도 시간대에 따라, 보는 위치와 각도에 따라 모습이 전부 다르다.

오름 정상에 오르자 거센 바람이 불었다. 우도와 성산봉 등이 내려다보인다. 밑으로 내려오니 돌담으로 둘러싼 무덤이 있다. 무엇이 산 것이고, 무엇이 죽은 것인가.

오조리 어촌계에서 운영하는 ‘오조리 해녀의 집’(064-784-7789)에 가서 전복죽으로 점심을 먹고 우도로 들어갔다. 내비게이션에 성산항을 쳐야하는데 우도항을 치는 바람에 약간 헤맸다. 생각해보니 바보 같은 짓이다. 우도는 배를 타고 가야하는 섬 아닌가? 우도도 꼭 한번 와보고 싶었던 곳이다.

간신히 배에 차를 실었다. 우도에 내려 먼저 우도봉으로 갔다. 아이스크림 가게가 눈에 띈다. 우도봉에서 내려다보는 바다가 코발트빛으로 빛난다. 우도의 바다 빛깔은 1년 내내 쪽빛이다. 검멀레해변에 갔다가 수동해변으로 갔다. 옥빛으로 아름다웠다.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물인가? 홍조단괴 해변은 그동안 산호모래 해변으로 잘못 알려졌는데 홍조류의 칼슘 성분이 침전돼 만들어진 홍조단괴가 깔린 해변으로 밝혀졌다. 천연기념물이다.

1600여명이 사는 우도에 한 해 100만명이 들어온다. 관광객이 너무 많이 몰려들어 환경파괴를 걱정하기도 한다. 우도에서 제주로 나오는데 마치 육지에 도착하는 기분이다. ‘제주어장 횟집’(064-752-3332)에서 저녁을 먹었다. 가격은 제법 비쌌지만 제값을 하는 음식점이었다. 제주항공 타고 왔다고 하면 5% 할인해준다.

▲ 우도 해변.
제주의 시인 김수열 시인을 일도2동에 있는 ‘영자포차’에서 만났다. 인천에 신현수가 있다면(크크) 제주에는 김수열이 있다. 농담처럼 얘기했지만 반쯤은 진담인 것이, 그는 시인이고, 사범대를 나왔고, 국어선생이고, 해직교사 출신이고, 제주민예총을 만들었고, 제주작가회의 회장이고, 두 아들이 있고, 부인이 선생이다. 살아온 이력이 나랑 똑같다. 누가 제주 훔쳐갈까 봐 하루도 제주를 못 비우는 제주 문화계의 중심이고, 제주의 주인이다.

‘영자포차’는 영자씨가 남편과 함께 해산물을 파는 동네 작은 식당인데, 수열이가 뭍에서 오는 손님들 접대하는 장소다. 황석영 선생, 손학규 전 대표, 김명곤 장관을 비롯해 이미 많은 사람이 다녀갔다. 나를 만나기 바로 며칠 전에 수열이의 다섯 번째 시집이 나왔다. 회를 배터지게 먹고 왔는데, 영자씨가 자연산 도미회를 깍두기처럼 썰어 내왔다. 눈과 머리와 배가 제각각 놀았다. 이런 때, 절망스럽다.

제주의 술 ‘한라산’을 마시면서 시집에 나온 시를 몇 개 읽는 동안 조천 ‘시인의 집’ 문을 일찍 닫고 합류한 손세실리아 시인은 혼자 일하느라 바쁜 식당 주인 영자씨의 일을 도왔다. 소주 ‘한라산’ 각 두 병으로도 모자라 “영자씨, 한 병 더”를 외치다가 결국 영자씨의 경고를 받고 ‘영자포차’를 나왔다. 헤어지기 못내 아쉬웠던 우리들의 술자리는 그 후로도 새벽까지 계속됐다.

제주현대미술관과 추사 유배지

▲ 제주현대미술관.
제주여행 셋째 날. 제주현대미술관으로 갔다. 제주현대미술관은 ‘저지문화예술인마을’ 안에 있다. 저지문화예술인마을엔 예술인 창작건축물과 야외조각공원 등 30여 동이 있다. 제주현대미술관은 2007년에 개관했는데, 김흥수 화백의 특별전시실도 있다. 구상과 추상을 결합한 하모니즘을 완성한 김흥수의 작품을 거의 무료로 볼 수 있다니, 제주사람들은 행복하겠다. 주변에 있는 방림원야생초박물관까지, 몹시 부러웠다. 미국 LA에 갔을 때도 가장 부러웠던 게 게티미술관이었다. 인천은 대체 언제, 어디에 미술관을 만드나.

‘탐라상춘’(064-772-6100)에서 칼국수를 점심으로 먹었다. 메뉴 표에 ‘접작국’이 있어 물어보니 뼈해장국 비슷한 제주 토속음식이란다. 점심을 먹고 서광다원(오설록)에 들렀다. 서광다원은 아모레퍼시픽이 1981년 92만㎡ 규모의 너른 평야지대에 만든 차밭이다. 2층 전망대에 올라가니 오름과 산들이 한눈에 보인다. 오설록 티뮤지엄에서 녹차아이스크림을 먹었다. 달지 않고 오히려 약간 씁쓰름한 뒷맛이 있다.

대정에 있는 추사 유배지로 갔다. 대정현은 요즘으로 치면 제주목, 정의현과 더불어 제주 3대 도시였다. 정의현에 남아 있는 마을이 바로 성읍민속마을이다. 그러나 대정현은 모두 사라지고 읍성만 겨우 남아 있다. 추사는 절해고도 제주에 위리안치형을 받아 9년 동안 집밖에도 나가지 못했다. 유배 중 부인이 죽는 등,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겪었으나 그 고통을 예술로 승화했다. 유배 중 고금 어디에도 없던 글씨체인 추사체를 만들었고, 날이 추워져야 소나무, 잣나무가 가장 늦게 시듦을 안다는 그 유명한 세한도를 그렸다. 추사는 천재였으나 한시도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는 단단한 벼루 10개를 구멍 냈고, 붓 천 자루가 닳아 없어졌다. ‘판전’은 그가 죽기 3일 전에 쓴 그의 마지막 글씨다. 추사체는 기교도, 작위도 이미 모두 버렸지만 가슴을 파고드는 묘한 느낌이 있다.

▲ 추사관.
제주 매화는 벌써 꽃봉오리를 밀어 올렸다. 봄이 멀지 않다. 건축가 승효상이 설계한 전시관인 추사관은 세한도에 등장하는 소박한 집을 본떴다. 전시관을 지하로 배치했는데, 승효상 선생이 설계했고, 1층의 추사 흉상은 임옥상 선생의 작품이다. 전시관에서는 귀한 글씨 100여점을 감상할 수 있는데, 대부분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을 비롯한 독지가들의 기증품이다. 고마운 일이다. 전시관을 나오면 추사가 머물던 당시 모습대로 다시 만들어놓은 초가집 세 채가 서 있다. 추사가 기거하던 안거리(안채), 밖거리(사랑채), 모거리(별채)로 이루어진 현재의 초가집은 고증을 거쳐 1984년에 복원됐다.

추사 김정희(1786~1856)는 열다섯 살 때 동갑내기인 한산 이씨와 결혼했지만 안타깝게도 5년 후 상처했고, 스물세 살 때 예안 이씨와 재혼했다. 그는 55세 되던 1840년에 사랑하는 아내를 두고 홀로 제주도로 유배를 떠났다. 34세에 대과에 급제해 출세가도를 달리던 그가 형조참판 시절에 정변에 휘말렸기 때문이다. 추사는 무려 8년 3개월 동안 유배생활을 했는데 유배된 지 3년 되던 해에 부인 예안 이씨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57세의 지아비는 아내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를 지어 슬픔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월로를 불러 저승에 호소하여 / 내세에는 그대와 내 자리 바꾸어 태어날까 / 나는 죽고 그대는 천 리 밖에 살아서 / 그대로 하여금 이 슬픔을 알게 했으면’

추사는 완당전집 10권 중 5권이 편지일 정도로 편지를 많이 썼다.

‘오늘 집에서 보낸 서신과 선물을 받았소. / 당신이 봄밤 내내 바느질했을 시원한 여름옷은 겨울에야 도착을 했고 / 나는 당신의 마음을 걸치지도 못하고 손에 들고 머리맡에 병풍처럼 둘러놓았소. / 당신이 먹지 않고 어렵게 구했을 귀한 반찬들은 / 곰팡이가 슬고 슬어 당신의 고운 이마를 떠올리게 하였소. / 내 마음은 썩지 않는 당신 정성으로 가득 채워졌지만 / 그래도 못내 아쉬워 집 앞 붉은 동백 아래 거름되라고 묻어주었소. / 동백이 붉게 타오르는 이유는 당신 눈자위처럼 많이 울어서 일 것이오.’

64세에 제주도 유배에서 풀려난 추사는 66세에 다시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다가 1년 만에 풀려났다. 부친이 경기 과천에 마련한 과지초당에서 71세를 일기로 한 많은 생을 마쳤다.

▲ 용머리해안.
용머리해안으로 갔다. 하멜 표류기로 유명한 하멜이 표류할 때 탔던 배, 스페르베르호의 실물이 세워져 있다. 그런데 원래 실물 크기의 80%라 한다. 그 이유는 당시 예산이 그것밖에 없어서라 한다. 대단한 대한민국. 더구나 하멜의 표착지가 용머리해안이 아니라는 설이 있어, 스페르베르호는 이래저래 힘겹다. 하멜이 보고서(표류기)를 쓴 이유는 회사에 13년간의 임금을 청구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용머리해안은 바람이 세게 불거나 물때가 맞지 않으면 폐쇄되는 곳이다. 그러니 운이 좋아야 내려가 볼 수 있다. 원래는 입구와 출구가 달라서 돌아 나올 필요가 없는 곳인데, 내가 간 날은 운이 좋아 해안가로 내려갔지만 중간에 막아 놓아서 다시 돌아 나올 수밖에 없었다. 천연기념물 526호다. 해삼과 전복, 멍게를 파는 사계리 어촌계 해녀할머니들도 그대로 용머리해안가 풍경의 일부가 된다.

용머리해안 근처에 있는 제주 유일의 온천 ‘산방산온천’(064-792-8300)에서 목욕했다. 탄산온천이라 그런지 물에서 뽀글뽀글 방울이 올라온다. 시내로 나와 ‘황금어장’(064-748-8989)에서 갈치조림으로 저녁을 먹었다. 갈치조림집인데, 역시 가격대비 만족도 매우 큰 곳이다.

사진ㆍ글/ 신현수 부광고 교사ㆍ(사)인천사람과문화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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