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영일 인하대 명예교수
취임하고 채 2년도 되지 않아 지지율이 곤두박질치면서 박근혜 대통령이 위기를 맞고 있다. 원칙과 신뢰의 이미지는 주류 언론이 날조한 환상이었음이 판명됐다. 국민대통합, 경제민주화, 정치혁신, 한반도 신뢰프로세스 등 표를 긁어모았던 대선 공약도 모조리 내팽개쳤다. 민생을 위한다는 명분 하에.

그런데 공교롭게도 민생을 챙기겠다던 대통령의 레임덕이 민생을 살리는 기회가 되고 있다. 계기는 연말정산 파동이었다. 소득공제에서 세액공제로의 연말정산 개편은 공정한 세제를 향한 전향적인 조치였다. 그런데 어떻게 ‘대란’, ‘파동’으로 몰리게 됐는가. 겉으로는 고임금소득자의 조세 저항으로 보였지만, 사실은 박근혜 정부의 정직하지 못한 행태와 ‘증세 없는 복지’ 공약에서 비롯됐다.

먼저 1조원 이상의 세금이 더 걷히는데도 정부가 ‘증세 없는 복지’에 얽매어 증세는 아니라고 강변했다. 다음은 MB정부가 단행한 ‘부자 감세’는 손대지 않고 임금소득만을 대상으로 했다. 이에 봉급생활자들이 분개한 것이다. 더 나아가서는 법인, 금융ㆍ재산소득 등 세제 전반에서 조세정의에 대한 열망에서였다.

건강보험료 부과체계 개편을 둘러싼 혼선도 같은 맥락이다. 현행 체계의 불합리와 비형평성은 김종대 전 국민건강보험공단 이사장의 ‘생활고에 시달리다 자살한 송파 세모녀의 건보료는 5만 140원인데 반해 5억원이 넘는 재산과 연 2300만원의 연금을 받는 자신은 직장가입자인 아내의 피부양자로 편입돼 한 푼도 내지 않게 된다’는 발언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국민 대다수가 동의하고 시행조건도 갖춰진 개편안을 대통령 지지율이 떨어지자 돌연 백지화했다. 비판 여론에 밀려 다시 전면 백지화는 아니라고 물러섰지만.

이로써 ‘증세 없는 복지’란 금기가 깨졌다. ‘증세 없는 복지’는 불가능하며 국민을 속이는 것이라는 새누리당 지도부의 비판이 결정적이었다. 이후 정부, 여야, 전문가로부터 복지와 증세를 둘러싼 담론이 봇물 터지듯 나오고 있다.

세금ㆍ복지 담론에서 명심해야할 점은 ‘복지는 목적이며, 세금은 수단’이라는 것이다. 복지란 시장경제체제의 과정과 성과를 보완ㆍ시정해 지속가능한 사회 창출을 위한 제도적 장치다. 곧 정부의 존재이유다. 일자리, 연금, 보건, 의료, 교육, 보육, 주택 등 삶의 기본 필요(basic needs)를 제공해 개인이 각종 위험에 대처할 수 있게 사회안전망을 제공한다. 그리하여 궁극적으로는 개인의 잠재력을 개발하고 자아를 실현해 국가ㆍ인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기회를 보장한다.

따라서 복지와 세금은 특성상 어느 정당도, 누구도 일방적으로 수행해서는 안 된다. 국민적 합의로 경제규모나 발전단계를 고려해서 복지의 질과 수준을 결정해야한다. 복지비율을 국가 간에 비교하는 이유다. 또한 복지와 경제성장의 관계도 검토해야한다. 내수를 확대해 선순환관계를 확보하자는 주장도 여기에서 비롯된다. 그 후에 부담할 세금을 결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증세 없는 복지’는 세금을 먼저 정해놓고 그 제약조건 아래에서 복지 혜택을 정하기 때문에 본말이 뒤바뀐 것이다. 암묵리에 ‘저세금 저복지’를 지향한다. 동시에 논의를 시작하기도 전에 한 번도 온전히 혜택을 누려본 적도 없는 복지 과잉을 제기한다든지, 재정악화를 복지 탓으로 돌리는 일은 또 다른 국민기만이고 거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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