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람] 강정희 각설이타령 예술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빨간 사람이 있다. 짧은 머리카락을 빨간색으로 염색했고, 위아래 옷은 물론 속옷과 양말까지 빨갛다. 심지어 신발과 가방까지 빨간색으로 치장한 사람이 부평구 삼산동에 살고 있다는 제보를 받고 그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삼산동 미래타운 3단지에 살고 있는 그는 강정희(69ㆍ사진)씨다. 미래타운 3단지 노인정에서 그를 만났다.

충청도에서 태어나 네 살 때 서울로

▲ 강정희 각설이타령 예술가
강씨는 충청도에서 6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네 살 때 온 식구가 서울 신길동으로 이사 했다. 큰오빠가 당시 철도국에 취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울로 이사 하는 과정에서 사고로 어머니를 잃었다.

“아버지가 눈이 안 보이는 일을 겪었어요. 저도 어렸을 때라 어른들이 하는 얘기만 듣고 그 기억밖에 없는데, 아버지가 물구덩이에 묻힌 묘를 옮기는 일을 하고 나서 눈이 멀었대요. 그리고 저를 포함한 6남매는 머리가 하얗게 됐고요”

사실 확인을 하고 싶을 만큼 믿기 어려운 얘기들이다. 강씨의 구술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한계에 답답하기도 했지만, 그의 기구한 인생에 처연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아버지가 눈이 멀어 어머니가 가장노릇을 해야 했다. 어머니는 이사를 하는 과정에서 큰 쌀독을 충청도에 두고 온 사실을 뒤늦게 알고 다시 충청도로 내려가 항아리를 들쳐 업고 올라왔다. 그런데 1950년대 초반, 논이 대부분인 신길동에서 논두렁을 걷다가 항아리가 떨어져 힘줄이 끊어지는 사고로 죽음에 이르렀다. 지금에야 큰 사고가 아닐 수도 있지만, 그 일로 어머니를 잃었다.

시장통에서 떡집하며 풍악 즐겨

그의 나이 스물 셋에 서울 양평동으로 시집을 갔다.

“제가 양평동에서 떡집하면서 30여 년간 새마을부녀회 활동을 했어요. 새마을협의회 회장님이 ‘덩덩 쿵따쿵’ 풍물을 처음 가르쳐주셨는데, 그걸 배워서 사람들과 공연을 다니기도 했죠. 개인적으로 복지회관에서 배우기도 했고, 인천 와서는 주민센터에서 배우기도 했습니다”

활달한 성격의 강씨는 새벽에 에어로빅을 배우러 여의도광장까지 가기도 했다. 그 당시 여의도광장에는 효창동 등, 서울 사람뿐만 아니라 인근 안양에서도 사람이 모이곤 했다. 에어로빅을 배우기 시작한 지 일주일 만에 에어로빅 강사는 강씨를 부르더니 사람들을 가르치라고 해, 당황한 기억도 있다. 그 후 강씨는 양평동에 있는 작은 공원에서 사람들을 모아 에어로빅을 가르치기도 했다.

힘들지만 재밌게 살던 강씨에게 어려운 일이 연거푸 일어났다. 큰애가 초등학교 저학년이던 때, 강씨는 큰애와 동네에서 배드민턴을 치고 있었다. 그때 떡집 근처에서 고물상을 하던 아저씨가 큰애의 배드민턴 채를 빼앗아 자신과 치자고 졸라 몇 번 치고 있는 모습을 그녀의 남편이 목격했다. 남편은 갑자기 그녀에게 다가와 양쪽 뺨을 사정없이 때렸고, 그로 인해 양쪽 고막이 찢어졌다.

“양쪽 귀에 인공고무를 넣고 다니는데 비행기 소리처럼 ‘우릉’거리는 소리가 나요. 빨리 세상을 뜨려고 저한테 사랑을 한꺼번에 쏟기 위해 그 극성을 피운 게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해요”

강씨와 여덟 살 차이인 남편은 그녀의 나이 마흔다섯에 2남 1녀를 남겨두고 세상과 이별 했다. 남편과 이별한 후 그녀는 혼자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갖은 고생을 했다. 일을 많이 해 어깨와 허리 등 관절이 좋지 않아 수술을 하기도 했고, 급기야 시장통에서 같이 장사하던 사람과의 갈등으로 쓰러져 뇌수술을 받기도 했다.

“시골에서 고추를 가져와 사람들에게 팔기도 했는데, 제 가게 옆에서 고추를 팔던 언니가 그게 싫었나 봐요. 평소에 나와 친하던 언니가 날 비웃기 시작했고, 그 모습에 너무 화가 났어요”

주변 지인들의 만류로 감정을 조절하려했으나 생각할수록 괘씸하다는 생각이 커졌다. 감정도 식힐 요량으로 한강공원에 바람 쐬러 나갔다가 그 언니네 집에 가서 따지기 시작했다. 한 시간을 그 집에서 소리 지르자 갑자기 입이 삐뚤어지는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급히 병원에 이송돼 머리 앞쪽을 보니 혈관이 터지기 직전에 팽팽하게 부풀어있어, 뇌수술을 해야만 했다. 그때 강씨는 50대 중반이었다.

노랑머리에서 빨강머리로 변신 완료

▲ 강정희 각설이타령 예술가
어릴 때부터 머리가 하얗던 강씨는 떡집을 할 때는 노란 색으로 염색했다. 10여년 전 둘째딸이 살고 있는 인천에 와서는 빨갛게 염색하기 시작했다.

“다른 이유는 없어요. 노인들이 살고 계신 요양원에 공연하러 갈 때 활기차게 보이기 위해서죠. 빨간 옷은 떡집에 있을 때부터 입었어요. 일할 때도 빨간색 트레이닝복을 입고 일해서 유명했죠. 원래 빨간색을 좋아하긴 했는데 시장에서 닭집 하는 이가 저보고 돈도 많으면서 구질구질하게 하고 다닌다고 한 말을 듣고 나서 화려하게 바꿨죠. 원래 화려한 것도 좋아해 전체를 빨강으로 물들였습니다”

자녀들의 반대는 없었냐는 질문에, 오히려 대수술을 다섯 번이나 한 엄마가 화려하게 하고 다니는 걸 좋아한다고 했다. 인천에 온 후 강씨는 ‘무궁화꽃 예술단’과 함께 강원도 속초, 경상북도 청도 등, 전국으로 공연을 다닌다.

“저는 각설이타령을 주로 해요. 각설이 옷을 입고 단장님이 색소폰을 불면 춤을 추기도 합니다. 우리 예술단은 무용, 민요, 가요 등 다양한 장르의 예술을 무료로 봉사차원에서 공연하고 있죠”

강씨의 말을 듣고 인터넷을 검색하니 빨간 머리에 각설이 옷을 입고 깡통을 차고 노인들을 웃기느라 여념이 없는 영상이 많이 올라와있다.

“노인들을 웃기기 위해 흔들고 춤춥니다. 노인들이 좋아하면 30분을 할 때도 있어요. 요양원에서 재밌게 해드리면 보람도 있지만 오히려 내가 감사하죠. 시간과 건강이 허락되는 날까지 계속 봉사할 계획입니다. 수술한 다리가 아프지만 노인들과 즐겁게 놀다보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잊고 있다가 공연이 끝나면 다리가 시큰거려 뒤뚱거리긴 합니다. 하지만 정말 행복합니다”

마지막으로 강씨는 “제 인생의 목표는 재밌게 살면서 끝까지 봉사하는 겁니다”라며 “10여년 전에 인천에 왔는데 여기가 참 좋아요. 지금은 이곳이 고향이지요. 둘째딸과 여기 인천에서 계속 살면서 행복하고 싶습니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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