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에 계신 시부모님이 커다란 상자 가득 대봉(떫은감)을 담아 보내셨다. 세어 보니 100개나 된다. 이 많은 걸 어찌해야 하나 잠시 고민하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어머님이시다. 감을 받았는지 물으시더니 “사과도 같이 보냈응게, 바로 먹을 것 몇 개는 사과랑 같이 봉지에 넣고 묶어놓아라” 하신다.

사과랑 같이 두면 감이 빨리 익는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상자엔 사과도 몇 개 들어있었다. 사과가 단단한 감을 익게 한다니, 사과에서 무슨 마법의 가루나 요술기체라도 나오는 것일까?

우선, 감의 실체를 살펴봐야겠다. 감은 떫은맛이 특징이다. ‘타닌’이라는 성분 때문이다. 감은 크게 ‘단감’과 ‘떫은감’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딱딱한 상태로 바로 먹을 수 있는 것이 단감이다. 원래 수용성물질인 타닌은 감이 익으면서 차차 물에 녹지 않는 불용성 타닌으로 변한다. 단감은, 나뭇가지에 매달린 상태에서 이 과정이 빠르고 순조롭게 진행된다. 따라서 단감을 씹어도 타닌이 침에 녹아들어가지 않고 혀는 떫은맛을 느낄 수 없다.

 
반면, 떫은감은 이 과정이 무척 더디게 일어난다. 단단했던 과육이 풀어져 말랑말랑하게 되어야만 겨우 입에 넣을 수 있을 정도가 된다. 물론 이 상태가 될 때까지 나뭇가지에 매달아놔도 상관은 없다. 다만, 까치에 콕콕 쪼인 상처가 생길 수 있고, 수확하기도 어렵다. 바닥에 닿자마자 ‘툭’ 하고 터져버릴 테니 말이다.

그래서 떫은감은 단단한 상태로 수확해 숙성시킨다. 서늘한 곳에 두고 느긋하게 기다렸다가 익는 대로 하나씩 골라 ‘호로록’ 먹는 그 재미! 그 달콤함! 아차, 연시 맛을 상상하느라 깜빡 사과를 잊을 뻔했다.

과일이 익으려면 에틸렌이라는 식물호르몬이 필요하다. 에틸렌은 탄소 2개와 수소 4개로 이뤄진 분자로, 과일성숙호르몬 또는 스트레스호르몬이라 부르기도 한다. 식물이 호흡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져 기체(가스) 상태로 배출되는데, 씨앗이 싹트고, 꽃이 피고, 과일이 익는 과정뿐만 아니라 식물의 노화도 촉진한다.
수확한 상태에서도 에틸렌은 계속 만들어진다. 따라서 에틸렌은 과일의 신선도를 해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사과는 에틸렌 배출에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사과와 함께 있으면 과일이나 채소들이 빨리 시들고 상해버리기 쉽다. 하지만 떫은감은 채 익지 않아 숙성이 절실한 상태다. 이때 사과의 에틸렌이 감의 숙성에 큰 도움을 준다. 바나나와 토마토, 망고 등 다른 후숙과일에게도 마찬가지다.

실제로 시장에 나온 연시는 인위적인 가스를 쏘인 것이 대부분이다. 최근까지 ‘카바이드’라는 화공약품을 사용했는데, 인체에 해롭다는 이유로 2008년 사용이 금지됐다. 카바이드를 물에 넣으면 과일숙성을 촉진하는 또 다른 호르몬인 아세틸렌이 만들어진다.

하지만 독성이 있는 수산화칼륨까지 함께 만들어지는 단점이 있다. 그래서 농촌진흥청은 에틸렌을 이용한 방법을 농가에 소개하고 이를 장려하고 있다. 에틸렌 발생제를 탈지면에 묻혀 감이 있는 용기에 담아 두면 5~7일 후 연시를 먹을 수 있다고 한다.

한참 떠들긴 떠들었는데, 뭔가 허무하다. 어머님은 아셨을까? 사과에서 나오는 에틸렌의 존재를? 여쭤보고 싶지만, 이내 과묵하신 어머님의 한 마디가 귓가에 들리는 것 같다. “그냥 그렇게 놓아 두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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