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집에서 하룻밤 잤다. 엄마 집과 우리 집은 걸어서 고작 십 분 거리. 지난 주말, 남편이 수련회에 참석하느라 하루 집을 비우면서 내게 ‘어머님 댁에서 하루 자고 오라’는 특명을 내렸다. 입덧 때문에 골골대는 내가 걱정됐던 모양이다.

나는 결혼 전 몇 달 동안 엄마와 함께 살았다. 가장 좋았던 건 (참 죄송하게도) 가사노동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됐던 점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목욕 후 습기 가득한 목욕탕에서 굳이 옷을 껴입고 나오지 않아도 된다는 점. 마치 혼자 살 때처럼. 이건 나도 엄마도 마찬가지였다.

이날도 그랬다. 막 목욕을 마치고 나온 엄마를 보고선, 난 늘 해오던 것처럼 “내가 엄마 피부를 닮아야했는데”라고 말했다. 엄마 역시 “옛날엔 말도 못하게 희었어”라고 답했다. 그런데 뭔가 달랐다. 피부에서 물기가 빠진 듯했다. 팔을 만져보고선 깜짝 놀랐다. 아니, 언제 이렇게 쪼글쪼글해진 거지? 자세히 보니 어깨엔 검버섯도 몇 개 피어 있다. 예전엔 보이지 않던 것이다. ‘아! 엄마가 이제 할머니가 돼가는구나’ 하는 생각에 기운이 빠지는 느낌이었다.

‘늙음’을 나타내는 한자 ‘老’(늙을 로)는 ‘耂와 ‘匕’로 이뤄져있다. 耂는 머리카락을 길게 기른 사람의 모습을 나타낸다. 여기에 지팡이 모양의 匕를 더해 뜻을 확실히 했다. 고대에는 신을 모시는 이만이 머리를 기를 수 있었다고 한다.(<한자의 세계>, 시라카와 시즈카) 한 공동체에서 제례는 대단히 중요한 행사였다.

이를 주관한 이들은 대부분 경험과 지식이 풍부한 노인이었다. 노인의 위상이 지금과 많이 달랐음을 드러내는 글자다.

 
한자의 기원을 밝힌 <설문해자>라는 책에선 ‘깊이 생각하다’는 뜻의 ‘考’(고)는 ‘老’와 같은 글자라고 설명한다. ‘考’ 한자 속의 머리 긴 노인은 老의 노인에 비해 더 구불구불한 지팡이를 짚고 있다. 考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다. 우선, ‘늙다’라는 뜻에서 ‘자세히 생각한다’는 의미로 확장됐다는 설이 있다.

나이든 이들은 충동적으로 행동하기보다 경험을 바탕으로 충분히 생각한 후 결정한다는 데에서 나온 설이다. 또 한 가지는, 노인을 떠올리면 자연스레 돌아가신 부모님이 생각나기 마련이다. 부모님에 대한 때 늦은 생각은 끝이 없다. 여기에서 ‘생각하다’는 뜻이 나왔다는 것이다.

후자의 설명이 감성적이긴 하지만, 나는 전자의 설명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왜냐 하면, 발음은 같은데 모양만 다른 한자들의 경우, 서로 비슷한 뜻을 갖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考(고)의 음은 古(옛 고), 固(굳을 고), 高(높을 고)와 같다. 이 한자들을 한 쾌에 꿸 수 있는 공통점은 오래돼 단단해지고 높아지고 늙어진 무언가, 즉 많은 ‘생각’과 역사가 축적돼있는 무언가를 나타낸다는 점이다. ‘약하고, 느리고, 뒤떨어진’ 느낌은 전혀 받을 수 없다.

이래저래 울적한 일요일 밤, 수련회에서 돌아온 남편과 텔레비전을 보는데 가수 최백호가 나와 ‘낭만에 대하여’를 부른다. 코밑과 턱에 흰 수염이 송송 나 있고, 백발이 된 머리는 빗질 이외에 별다른 힘을 주지 않은 것 같다. 게다가 화장도 전혀 하지 않은 듯, 얼굴 곳곳에 검버섯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나는 깊은 숨으로 부르는 ‘낭만에 대하여’에 완전히 빠져들고 말았다. 가슴에서 멈춘 숨이 터져 나올 것도 같고, 눈물이 날 것도 같았다.

그가 내게 무언가를 담담히 말해주는 듯했지만, 미련한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아직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다. 세월이 지나면 그때에야 비로소 알 수 있을지 그조차 막연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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