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람] 차경진 조각가

“자연은 어마어마한 스승이에요. 하찮게 여겨 버리는 것들이, 사실은 지구를 살리고 있어요. 그리고 자연은 모든 생명이 서로 연결돼있고 연관돼있다는 걸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사람도 혼자가 아닌 더불어 살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불교의 ‘연기법’과 보로노이의 ‘다이어그램’을 설명하는 이 사람, 조각가 차경진(52ㆍ사진)씨를 10월 1일 부평3동에 있는 그의 작업실에서 만났다. 수학ㆍ철학ㆍ건축학ㆍ지리학ㆍ생명공학 등을 넘나들며 직구를 던지는 그와의 대화는 신기하고 재밌었지만, 쉽지 않았다.

보로노이의 원리

▲ 차경진 조각가
특정한 점과 가장 인접한 두 점을 잇고 수직이등분선을 그으면 다각형의 모양이 나오는데 이 때 생기는 다각형을 보로노이 다각형이라고 한다. 보로노이 다각형은 특정 점을 중심으로 가장 가까운 점들을 모은 집합이 된다. 공간 생성에서 똑같은 패턴을 반복하며 진화하는 황금디자인인 ‘보로노이의 다각형’의 원리를 응용해 다양한 학문에 접목한다.

“점을 찍고 선을 연결하는 조형의 기본요소인 점ㆍ선ㆍ면의 원리로 시작해요. 그러면 스스로 네트워크를 만들어요. 사회관계와 구조도 식물의 잎맥, 그물망처럼 형성돼 있죠. 점ㆍ선ㆍ면으로 영역을 확장해나가는데, 그게 어마어마하죠”

이런 원리로 작업을 하는 차 작가의 작업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보로노이’를 알아야하는데,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저도 처음엔 이런 원리가 있다는 걸 몰랐어요. 우연히 점을 찍고 점과 선의 구조를 분석해서 찾다보니 이미 누군가 자연 안에 있던 원리를 건축공학ㆍ과학ㆍ생물학ㆍ천문학에 적용하고 있었다는 거예요. 중요한 건, 작가나 디자이너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미 존재하고 있는 진실을 파헤쳐 겉으로 드러내 실제화 하는 것이죠. 구체적으로 인간과 자연환경이 만나는 접점에서 우리의 마음을 시각적으로 맑고 유익하게, 또는 즐겁고 편리하게 소통할 수 있도록 찾고 형상화하는 게 그들의 역할입니다”

가면과 얽힌 20여년의 삶

차 작가의 고향은 전라북도 군산이다. 중학교 2학년 때 자전거를 타고 통학하다가 대형 트럭과 충돌하는 사고를 겪었다. 안경이 얼굴 살을 찢고 파고들기도 했고, 다량의 출혈로 50여 바늘이나 꿰맸다.

“그때의 경험은 엄청난 충격이었어요. 아수라백작처럼 얼굴 반쪽에 상처가 심했어요. 중학교 때 수술한 후에도 얼굴에 안경 유리조각을 10여년 넣고 다녔어요. 손으로 누르니까 아파서 병원에 갔더니, 조각이 있다고 해서 또 수술했죠”

그래서였을까? 그는 1986년 서울대학교 조소과에 입학해 우연히 용접으로 가면을 만들다가 그것에 심취해 20여년을 가면만 만들었다.

1990년대 초, 대학 졸업 후 군산으로 가 방앗간을 작업실로 개조해 창작활동에 몰두했다. 2006년 인천에 와 인천 혜원갤러리에서 두 번째 개인전 ‘실존의 그림자’를 열었다.

“어떤 관람객이 제 가면 작품을 보면서 우는 거예요. 그때 생각했어요. ‘아! 작가는 대중과 소통하는 사람인데 내 경험을 주관적으로만 해석해 작품을 만들었구나’라고요. 물론 작품을 통해 자신의 얘기를 할 수도 있지만, 객관화하는 공정이 없다면 자기 얘기만 쏟아내는 푸념밖에 안 된다고 생각해요”

‘떠도는 이’라는 제목의 작품인데, 동판 조각들을 이어 만들었다. 작품의 왼쪽은 수직 조각들을, 오른쪽은 가로로 된 조각들을 모아 붙였다. 그는 자신의 작품이 그 사람에게 슬픔을 준 것이고, 아직도 본인이 상처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살았던 증거라고 했다. 그 이듬해 ‘숲의 욕망’이라는 제목으로 세 번째 개인전을 서울과 인천에서 열었다. 버려진 나무들을 모아 박힌 못을 뽑고 표면을 다듬고 불로 태워 보름 동안 정화시키는 과정을 거쳐 작품을 만들었다.

“나무 조각 3000여개를 엮어 작품들을 만들었습니다. 이것 또한 가면들이었죠. 쓰다 버린 폐목들을 추슬러 가면들의 숲을 일궈낸 거죠”

한 미술평론가는 ‘숲의 욕망’의 가면들이 전작의 가면들에 비해 더 가면답다고 했다. 더 무표정해 보이고 더 무감동해 보여 상처를 침묵 속에 내재화한 것이라 해석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그 상처를 깊이 보듬고 치유해 상처와 화해를 시도하고, 자연으로 회귀하려는 것 같다고도 했다.

차 작가는 지금까지 작품성을 우선해 창작활동을 했다. 그러나 경제적 어려움과 규모가 있는 작품을 만들다보니 보관할 공간 문제에 부딪혔다.

어머니의 조각보에서 영감 얻어

▲ 보로노이 원리를 응용해 만든 작품들이 작업실 한쪽 벽면에 걸려있다.
가면에 대한 이미지를 벗고자 했다. 또한 공간에 대한 제약이 많다보니 하나의 큰 작품을 만드는 것을 계속 할 수 없어, 다른 방법을 고민했다. 그 고민은 자연스레 ‘맞춰지고 끼워지는 것’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졌다.

“무의식에 있는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나왔습니다. 예전에 어머니가 조각보 바느질하던 게 생각났어요. 어렸을 때 어머니가 아버지와 사이가 안 좋을 때나 마음이 답답할 때면 유난히 그런 것을 많이 만들곤 하셨어요. 그때의 상황이 좋지 않은 기억으로 남아있는 것도 있지만 어머니의 솜씨는 정말 예술작품을 창작하는 것 같았죠”

이불보, 상보뿐만 아니라 재봉틀로 많은 것을 만드셨다. 뜨개질도 잘해 손수 스웨터를 뜨면 주변사람이 살 정도로 솜씨가 좋았고, 그런 어머니는 몇 년 전까지도 옷을 직접 만드셨다.

부분이 전체가 되고, 전체가 부분이 되는 관계가 중첩되면서 여백과 덩어리가 주는 이미지에 대한 고민으로 확대됐다.

“2010년 전시한 ‘님의 향기’라는 작품은 법정 스님이 한평생 몸에 걸치셨다는 누더기 옷이 모티브가 된 작품이에요. 어머니의 조각보와 뜨개질은 제 기억의 창고입니다”

자연으로 회귀(Return to nature)

가장 최근의 전시는 작년 2월, 미추홀 갤러리에서 연 개인전이다. ‘리턴 투 내이쳐(Return to nature)’라는 제목의 이 전시는 제목에서 선명하게 밝히고 있듯, 버려진 것들을 살려 순환의 소중함을 말하고 싶었다.

“자연은 그냥 두면 알아서 사는데, 인간은 오염시켜놓고 살리자고 말이 안 되는 소리를 합니다. 버려진 에어컨 배관 파이프, 폐목들을 재활용해 새롭게 태어나는 것을 표현하려 했어요. 인드라망 아시죠? 우리는 모두 연결돼있는 관계예요”

차 작가는 결혼 10주년을 기념해 아내에게 항아리에다 연잎을 선물했다. 그리고 3년간 우렁이가 이파리를 갉아먹는 걸 관찰하면서 잎맥을 살펴봤다. 세부적으로 연결된 잎맥을 관찰한 차 작가는 자연에서 네트워크를 발견했다. 또한 우렁이가 자신의 살을 새끼에게 다 주고 자연으로 돌아가는 모습에서 순환의 법칙을 배웠다.

“자연을 돌아보기 시작했어요. 작은 것들이 지구를 살리고, 최소한의 것들에도 본질적인 조형미가 있다는 것을 느꼈죠. 7년 전부터 십정동에서 텃밭농사를 시작했고 지금은 가좌동 여우재에서 농사를 짓는데, 그러면서 확실히 배운 거 같아요”

새로운 시도, 닉네임이 ‘어마어마’

▲ 창작활동에 몰두하고 있는 차경진 작가.
인위적인 작품만을 추구했다면 자연 속에서, 일상 속에서 항상 존재해온, 숨어있는 것들을 발견하지 못했을 거라고 말하는 차경진 작가. 자연으로 돌아가 진실을 발견하려는 노력과 구조와 원리를 분석하려는 시도가 그를 새로운 세계로 이끌었다.

“예전의 작업은 순환의 원리를 시각적으로 재현하거나 재구성해 작품으로 담아냈어요. 4년 전 보로노이의 원리를 접하면서 새로운 시선으로 작품을 제작하고 있어요. 점ㆍ선ㆍ면ㆍ구의 원리에서 출발해 보로노이의 원리에 이르면서 공간에 대해 질문을 계속 던졌습니다. 좀 더 총체적인 공간디자인에 대한 이론과 실제를 연구하면서 제 작품세계가 풍부해질 것입니다”

차 작가는 올 가을, 한양대사이버대학원 디자인기획과에 입학했다. 작품 활동과 공부를 병행하느라 바쁘지만 행복한 시간이란다. 학습과 경험 속에서 체득한 보로노이의 원리를 과학적 논리로 논문을 쓰고자 만학도의 길을 선택했다.

“내가 생각한 것들을 이론적으로 배울 수 있어서 정말 좋습니다. 이 원리를 다양한 미술 분야에 접목해 공간 생성과 기획에 최적의 디자인을 연출하고 싶습니다”

차 작가의 닉네임은 ‘어마어마’이다. 명확한 과학적 사고가 바탕이 된 작품이야말로 미래의 비전이 될 거라 확신하기 때문이다.

깨달을수록 행복하고 자신이 발전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때마다 살아있음에 감사하고 행복하다는 차 작가는 다시 태어나도 이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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